최성묵 목사의 KSCM 간사 시절: 열정과 고난의 연대기

1960년대 초, 한국기독학생운동(KSCM)은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 대학YMCA, 대학YWCA라는 세 개의 주요 단체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단체는 대외적으로 세계기독학생운동연맹(WSCF)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WSCF는 한 나라에 하나의 회원단체만을 인정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학생들이 갈라지지 않고 통합하여 하나가 되자는 요구가 커졌다.

1955년, 학생기독교운동체들의 통합을 위한 명동협의회가 열렸고, 여기에는 WSCF 아시아지역 간사 쵸·탄(Kyaw Than)과 3단체의 지도자 및 학생대표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각 단체의 역사적 특성과 사회적 역할의 차이를 넘어 일치를 지향할 것을 합의했다. 중요한 합의 사항 중 하나는 학생기독운동협의회(KSCC)를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실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협의체 운영체제가 1959년에야 겨우 조직되었고, 실무진이 없는 상태였다.

그 시기에 외부에서는 통합에 유리한 조건이 제공되었다. 미국 감리교회는 한국감리교회에 미국식 교파적 청년학생운동을 도입하기 위해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그 중 한 명인 제임스 레이니 목사는 후일 미국 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감리교단은 선교사의 봉사영역을 KSCC로 옮기고, 정동의 젠센기념관을 제공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성묵은 KSCM 간사로서 열심히 일했다.

최성묵의 가족은 제천에서 경주로 이주한 후,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때 김순이는 장녀 혜림을 할머니 댁에 맡기고 장남 혜승만 데리고 상경했다. 서울에서 최성묵은 바쁘게 움직이며 밤늦게 귀가했다. 김순이는 그를 위해 따뜻한 밥과 국을 준비하고, 둘만의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활동과 생각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대화는 그들의 각별한 애정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최성묵에게는 누군가가 돈을 빌려달라고 사정해왔다. 최성묵은 그 사람의 약속을 믿고 사무실의 돈을 빌려주었지만,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 돈은 사무실의 공금이었기 때문에 최성묵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김순이는 화가 났지만,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결국, 그녀는 살고 있는 집의 전세금을 빼서 사무실의 돈을 메꾼 후, 그 사람을 찾아 나섰다. 어린 혜승을 등에 업고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김순이는 막내 시누이를 앞세워 그 사람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은 매우 낡고 더러운 집이었으며, 채무자를 만나도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김순이는 결국 돈을 돌려받기를 포기해야 했다.

이후 김순이는 월세를 내기 위해 방을 구하러 다녔다. 복덕방에서 소개받은 적산 집에 가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월세를 선불로 내지 못한다며 빌리기를 요청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김순이가 아기 엄마라는 이유로 믿음을 주어 방을 얻어주었다. 이렇게 최성묵의 가족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최성묵은 지나치게 이재에 대한 관념이 없었고, 그 때문에 김순이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어느 날 김순이가 젠센기념관에 들렀을 때, 사무실의 여직원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간사님이 사무실에 있으면 고향사람들이 찾아오고, 항상 돈이 없다고 하면서 사정하는데 그럴 때마다 주머니에서 털어서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김순이는 이러한 고된 삶 속에서도 열심히 일하며 가족을 꾸려 나갔다. 식사는 오로지 밥과 김치로 때우고, 난방은 연탄으로 해결했다. 그들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서로의 사랑과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최성묵과 김순이의 이야기는 단순한 생계의 어려움을 넘어서,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부부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함께하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깨달아 갔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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