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최성묵은 KSCC(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로 자리를 옮긴 후, 같은 해 9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연신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연신원에는 그가 존경하는 김정준 박사가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김정준 박사는 부산 동래 출신으로,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와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 독일 함부르크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공부한 후, 1949년 한국신학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63년부터 연세대 교목실장 겸 구약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연신원은 당시 한국의 신학교들이 독자적인 대학원을 설립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WCC 신학위원회에서 30만 불의 재정 지원을 받아 설립된 신학대학원이었다. 그러나 각 교단 신학교들은 2년이 지나지 않아 각자의 대학원을 시작할 정도로 한국교회의 교파주의는 뿌리 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성묵은 연신원에 남아 김정준 박사에게 구약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68년 2월 ‘제왕시에 나타난 왕 개념’이라는 논문으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에 최성묵은 김정준 박사의 수제자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의 야인적 성격과 운동에 대한 열정이 학자로 머물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박상증은 그 당시 학원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운동과 학문이 양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소위 학자들의 입장이었다. 그때는 ‘의식화’나 ‘praxis’ 같은 용어를 감히 사용하지도 못했다.” 최성묵은 운동과 학문이 함께 가야 한다고 믿었고, 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고수했다.
김정준 박사는 최성묵에게 영국 유학을 주선했지만, 최성묵은 가족의 고생을 염려하며 유학을 포기했다. 김순이는 어느 날 김정준 박사가 자신의 생일에 부부를 초청한 자리에서 유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최성묵에게 물어보았다. 최성묵은 “내가 유학을 가면 당신이 다시 과수원에 가서 고생을 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대답은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책임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성묵이 영국 유학을 거부한 이유가 단순히 가족의 고생을 염려했기 때문일까? 그는 운동과 학문이 함께 가야 한다고 믿었고, 당시 학계의 분위기에 실망하여 학문의 길을 포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최성묵이 영국 유학을 가고 교수가 되어 강단에서 평생을 보낸 것보다 재야 기독교운동의 지도자로서 살아간 것이 한국 사회의 발전에 더 큰 기여를 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그 삶이 최성묵 개인에게는 고난의 길이었을지라도.
최성묵의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시절은 그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운동과 학문을 함께 이어가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그는 학문을 통해 기독교의 본질을 탐구하고, 동시에 사회 변화에 기여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하며, 한국 사회의 발전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삶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헌신의 여정이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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