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최성묵은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KSCF의 활동을 마치고, 신앙의 말씀에 따라 사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던 중 부산에서 차선각과 이직형이 최성묵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이미 1960년대 초부터 KSCM과 KSCC 활동을 통해 최성묵을 잘 알고 있었다.
부산에서 모임에 올라오기 전부터 차선각은 최성묵을 꼭 만나고 싶어 백방으로 탐문하다가 겨우 천호동의 집을 찾았다.
기대와 흥분이 뒤섞인 만남은 금세 사회변혁을 위한 교회와 학생사회운동에 관한 열띤 토론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중국처럼 촌락에서 도시로, 지방에서 서울로 바람을 몰아간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 시간, 최성묵의 아내가 준비한 간단한 통국수 파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자리에서 “최선생, 부산으로 내려갑시다.”라는 이직형의 제안이 나왔다. 세 사람은 지역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의기투합하며, 최성묵이 부산 YMCA의 총무로 오면 더없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산 YMCA는 새로운 총무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최성묵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최성묵은 두 사람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서 최성묵은 약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지역 교회 지도자들과 YMCA 이사들을 만났다. 그는 장성만 목사, 유형심 목사, 김소영 목사, 김기엽 목사, 정태성 장로, 이광혁 장로, 김철구 선생, 여해룡 선생 등을 만나 YMCA 총무 후보 문제를 탐색하고 지역 사정을 살폈다. 그러나 기대했던 YMCA 총무 선임은 쉽지 않았다. 당시 부산 YMCA 이사회의 구성은 내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고, 명확한 선교 정책도 부재했다. 더구나 최성묵은 외지인으로서 진보적인 인사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동래호텔에서 열린 이사회는 결국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성묵은 서울로 돌아갔다가 깊이 고민한 끝에 결단을 내리고,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이때가 1968년 말경이었다. 이 결정은 김순이와 충분히 상의했지만, 차선각이나 부산 사람들과는 사전 협의가 없었던 터라, 최성묵 가족의 불시에 이루어진 부산행에 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으로 이사한 후, 최성묵은 이삿짐을 풀고 전셋집을 얻느라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런 직장이나 생계의 보장도 없이 무작정 낯선 곳으로 가족을 이끌고 간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성묵은 과감하게 결단했고, 김순이 역시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부산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최성묵에게 많은 도전과 기회를 안겨주었다. 그는 지역 사회와의 연결을 통해 기독학생운동의 가능성을 넓히고, 새로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부산 YMCA에서의 활동은 그의 신앙과 사명감을 더욱 깊게 하였으며, 지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다.
최성묵의 부산행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신념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지역 사회와 교회의 변화를 위해 헌신하며, 자신의 신앙과 가치관을 실천하기 위한 길을 모색했다. 이러한 그의 여정은 기독학생운동의 활성화와 지역 사회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며, 그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례로 남을 것이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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