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 가족은 부산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결심했다. 김순이는 천호동의 집을 팔아 부채를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부산 양정동에 전셋집을 얻었다. 양정동 언덕배기에는 집장사들이 지은 비슷한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형편이 어려워 방 하나를 세놓기로 했다. 계약금을 주고 세를 들어오기로 했던 사람이 사정이 생겨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하자, 김순이는 당연히 계약금을 돌려받지 않아도 되었지만 남의 돈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돌려주었다.
1969년과 1970년 무렵, 최성묵 가족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기가 찾아왔다. YMCA 총무직이 무산되면서 최성묵은 몸 담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깨끗한 옷을 입고 집을 나서 저녁 늦게 돌아오는 일상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김순이는 친정 어머니의 도움을 조금씩 받아 어렵게 살림을 꾸려갔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형편에서도 김순이는 매일 아침 최성묵에게 다방에라도 가서 쓸 용돈을 쥐어 주었다.
최성묵이 출근하던 곳은 광복동의 세명약국 앞에 있던 고전다방이었다. 이 다방의 주인은 YMCA의 이사를 맡고 있던 분으로, 최성묵은 일요일마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했다. 이 모임에는 우창웅, 차선각, 이상화, 여해룡, 김순규 씨 등이 함께했다. 최성묵의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현실 인식이 결합된 성서 해석은 모임을 진지하면서도 열띤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성경공부 시간은 최성묵에게 가장 즐겁고 보람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는 가끔 버스비가 없어 양정까지 몇 시간씩 걸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성묵은 그런 궁핍을 다른 사람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최성묵은 말 그대로 ‘거리의 신학자’였다. 교회의 제도 속에 설 자리가 없어 거리를 떠도는 신학자였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그러나 최성묵은 묵묵히 매일 아침 고전다방으로 출근하고 저녁이면 양정으로 퇴근하는 일상을 이어갔다.
그런 가운데 최성묵을 아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강연을 하게 되고 다양한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부산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강의했던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그의 지식과 경험은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학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시기에 김순이는 두 자녀를 더 출산했다. 1969년 6월에는 차녀 혜은이, 1970년 10월에는 차남 혜광이 태어났다. 연년생으로 아기가 태어나자 김순이의 친정어머니께서는 가사를 돌볼 사람을 보내서 딸의 어려움을 도와주셨다. 이렇게 최성묵의 가족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지지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있었다.
최성묵은 거리의 신학자로서 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며, 지역사회와의 연결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고난을 넘어, 신앙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수행하는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최성묵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념을 지키고 헌신하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그의 여정은 한국 사회의 발전과 기독학생운동의 성장에 기여하며, 후대에게도 큰 교훈이 될 것이다.
최성묵은 거리에서 신학을 배우고 가르치며, 진정한 의미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 헌신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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