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최성묵은 부산 YMCA 총무로 취임하게 되었다. 미국문화원에서 1년 반 정도 일한 후의 결정이었고, 그의 진보적 성향을 문제삼았던 부산 YMCA 이사회가 최성묵을 선택하기까지에는 그의 지지자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당시 부산 YMCA 이사회는 보수적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과 진보적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 간의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있었고, 최성묵은 이러한 갈등 속에서 총무직을 맡게 되었다.
부산 YMCA는 정태성 장로와 성창기업, 성지중고교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과 김길창 목사와 남성학원, 한성여대의 진보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고, 최성묵의 지명은 치열한 표결 끝에 가까스로 가결되었다. 취임 후 최성묵은 다양한 사업에 열정적으로 몰두했다. 시민논단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부산 시민들의 주요 관심사를 함께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YMCA의 대학생회를 조직했다. 이 서클은 '영봉'이라는 이름으로, 최성묵이 미국문화원에서 청년학생담당관으로 일할 때 함께 했던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유신체제 이후 중앙정보부의 압박으로 대학생 연합서클이 해체되면서, 미국문화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클들은 YMCA로 적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 대학생 조직은 1968년 KSCF로 통합되었지만, 지방 YMCA들이 청년 지도력을 육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대학생 조직을 부활시키기 시작했다. 부산의 경우, 최성묵이 YMCA에 있는 이상 그곳을 중심으로 재조직할 필요가 있었다. 이후 중부교회 청년부의 중심 인물들인 김영일, 조성삼, 임실근, 조태원, 이승원, 정외영 등이 모두 최성묵의 총무 재임 기간에 YMCA 대학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YMCA 대학부에 모인 서클들은 각기 다른 성격을 가졌지만, 최성묵은 학생들의 자율적 활동을 장려하고 보장하는 방식으로 지도력을 발휘했다. 영봉은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와 함께 부산 지역의 걸인 및 불우 청소년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부산 지역 대학생 협의회를 결성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일본 청산학원대학과의 상호 교류사업도 진행되었다.
최성묵은 젊은 대학생들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뜰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는 권위적인 방식이 아닌,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는 자세로 임했다. 그는 친구처럼 다가가며, 청년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담배를 피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당시 목사로서 논란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술과 담배를 즐기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형식적 계율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보였다.
당시 YMCA 대학생회장을 맡았던 임실근은 최성묵의 지도력을 이렇게 회상한다. “선생님은 나에게 ‘로마클럽 보고서’를 통해 지구의 제반 문제와 새로운 관점의 경영학에 흥미를 가지도록 도와주셨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와 같은 난해한 문학작품을 일깨워주셨고, 1960년대 유럽에서 일어난 청년문화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이야기 등으로 나를 자극하셨다.”
최성묵의 YMCA 총무 재임 기간은 그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어주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단순한 지도가 아닌, 함께하는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했고, 이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최성묵의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어려운 시대 속에서 청년들을 이끌고, 함께 성장해 나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헌신과 열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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