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9월, 최성묵은 미국문화원의 청년학생담당 간사직을 맡게 되었다. 대청동에 위치한 미국문화원에서 청년학생담당 간사를 공모했고, 최성묵이 그 자리에 채용된 것이다. 그 당시 신원조사를 담당했던 미국 관리가 “최 선생, 당신의 경력을 조사했는데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왜 한 사람도 없습니까?”라고 묻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이러한 말은 최성묵의 인품과 신뢰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미국문화원에서 청년학생담당 간사로 일하게 되면서, 최성묵은 부산에 온 후 처음으로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부산시내 대학생들의 연합서클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최성묵은 이들을 지도하고 지원하는 일에 매진했다. 서울에서 기독학생운동에 헌신했던 경험과 타고난 열정 덕분에 그는 미국문화원의 학생활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이 시기에 최성묵은 부산 중앙성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던 송기인 신부의 부탁을 받아 부두에서 하역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교양 강좌를 시작했다. 송신부의 기억에 따르면 이 강좌는 4년 동안 계속되었다. 최성묵은 노동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문화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최성묵 가족은 양정에서 대청동으로 이사했다. 양정은 출퇴근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대청동의 집을 방문했던 임실근은 그 집이 매우 초라했다고 회상한다. “대청동 대청예식장 밑 골목 안 허름한 2층집에 다다미 방이 하나 있었고, 조개탄 스토브가 방 가운데 놓여 있었다. 방 안은 어지럽게 널려있는 오래된 논문집과 잡다한 책들, 그리고 낡은 피아노 한 대가 전부였다.” 이렇게 좁은 방에 네 자녀와 아내, 최성묵이 함께 잠을 청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김순이 역시 미국문화원에 취직한 후 생활이 조금 안정되었다고 회상한다. 미문화원에서는 월급을 2주 단위로 받았고, 그 금액도 이전보다 많았다. 그러나 최성묵이 미문화원을 그만두고 부산 YMCA 총무로 일하게 되면서 다시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었다. 김순이는 남편의 월급 봉투를 직접 받게 된 것은 1977년 부산중부교회에서 목사직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고 전했다.
최성묵의 미국문화원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했으며, 동시에 그가 지역 사회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대학생들과의 활동을 통해 그들의 열정과 꿈을 지원하고, 나아가 부산 지역의 사회적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그의 신앙과 가치관을 실현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최성묵의 삶은 언제나 도전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갔다. 미국문화원에서의 경험과 활동은 그가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역 사회와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최성묵의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지켜 나갔는지를 잘 보여주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례로 남을 것이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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