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 목사와 한국 기독교 학생 운동의 통합: 고난과 헌신의 이야기

1960년대 기독학생운동의 통합 과정은 쉽지 않았다. KSCM(한국기독학생운동협의회)와 각 단체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독자성을 유지하려는 오랜 미련 때문에 통합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나 1968년 4월, KSCC(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는 교수, 학생, 실무자 대표로 이루어진 통합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에는 YMCA 전국연맹 이사들이 통합전권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통합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68년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수원 서울대 농대에서 열린 여름대회에서 KSCM과 대학 YMCA는 ‘한국을 새롭게’라는 주제로 마침내 통합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YWCA는 학생들의 원에도 불구하고 연맹의 이사들이 반대하여 통합운동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결국 YWCA를 제외한 두 단체는 1969년 11월 23일 종로 2가 YMCA 강당에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기독학생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968년 여름부터 공동사업을 논의해 오다가 1969년 1월 동계대학에서 ‘학사단운동 5개년계획’을 세움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 운동은 농어촌, 산간벽지, 공장, 빈민 지역 등 민중의 삶의 현장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회현실을 몸으로 인식해 보자는 것이었다. 1970년부터 학생들의 활동은 청계천 뚝방지대, 뚝섬 공장지대, 면목동 철거지대 등 공장과 빈민지역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현장 보고대회는 학교 안팎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성묵은 KSCF 통합 이후에도 열정적으로 활동했지만, 정작 통합된 KSCF에서는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1968년 수원의 통합대회 이후 그는 사실상 실직 상태에 들어갔고, 그에게 남은 것은 활동 과정에서 쌓인 빚 독촉뿐이었다. 이직형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800여 명의 대학생과 교수,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역사적인 통합 선언을 했다. 최성묵은 운동과 학문의 양립성을 주장했지만, 통합된 기독학생운동의 기득권에서 소외된 듯 보였다.”

최성묵이 통합된 KSCF에 몸 담지 못한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당시 새로 통합된 KSCF의 자리를 놓고 각 교단이 매우 민감하게 신경전을 벌였던 상황이었다. KSCC는 그 사명을 다하고 해체를 앞둔 상황에서, 실무자였던 최성묵은 아무도 다음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고립된 상태였다. 그는 미련 없이 스스로 물러나 자신의 설 자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최성묵이 경험한 고난은 더욱 고약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KSCC 활동 중 생긴 부채 문제는 그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채권자들은 실무자인 최성묵에게 빚 독촉을 했고, 결국 그는 김순이가 결혼 이후 처음으로 마련한 천호동의 집을 팔아 그 빚을 갚아야 했다. 김순이는 “부산으로 가면서 빚을 갚지 않으면 빚을 피해 도망가는 것과 같은 꼴이 된다”며, 최성묵의 인격을 지키기 위해 집을 팔기로 결심했다.

결국, 최성묵은 기독학생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그의 헌신과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최성묵의 삶은 운동과 학문, 그리고 가족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지만, 그는 항상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며 헌신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의 고난을 넘어, 한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기독학생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잘 보여준다.

최성묵의 여정은 기독학생운동의 통합과 발전을 위한 그의 열정과 희생을 상기시켜 주며, 그가 남긴 발자취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