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KSCM(한국기독학생운동)은 전국 50여 개 대학과 200여 개 고등학교 기독학생회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었다. 이 시기에 KSCM의 총무를 맡았던 손명걸 목사와 최성묵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며 기독학생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의견 충돌이 종종 있었고, 최성묵은 때때로 화가 나면 책상을 돌려놓고 얼굴도 마주 보지 않을 만큼 고집이 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도 자청해서 맡았다.
최성묵을 처음 만난 이직형은 그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매서운 눈길을 가졌고, 질문을 하면 단답형으로 끝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땀에 젖은 노동모자를 항상 쓰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첫인상은 최성묵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KSCM에서 최성묵이 맡았던 일들은 다양했다. 그 중 하나는 국제 워크 캠프(Work Camp) 운동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1950년대에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청년 프로그램으로, 각국 청년들이 서로 교류하며 봉사활동을 통해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최성묵은 실무 간사로서 이 프로그램을 조직하고 참여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또한, 그는 청년학생단체협의회를 창립하는 데도 기여했다. 박정희 정권은 청소년을 우범자로 간주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동원하려는 정책을 추진하며 자율적인 청소년 활동을 억압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년학생단체협의회는 자율적 청소년 활동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세 번째로는 한국교회청년협의회(EYC)의 구성을 들 수 있다. 이 협의회는 교파주의 문제를 제기하고 극복하기 위한 초교파적 기독청년단체로서 설립되었다. 당시 NCC 청년 간사인 박상증 등은 에큐메니칼 청년대회를 추진하여, 이화여자대학교 기숙사를 사용하여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또한, 한국교회청년협의회는 1964년 12월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 에큐메니칼 청년대회에 한국 대표로 청년 44명을 파견하기도 했다.
1964년 6월, KSCC에서 감사를 맡고 있던 오재식과 레이니 목사가 미국으로 떠나게 되자, 최성묵은 KSCC의 일을 맡게 되었다. 그때부터 1968년 통합 대회를 거쳐 KSCC가 해산되기 직전까지 기독학생운동 통합작업의 기초적 실무는 모두 최성묵의 손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SCC는 군사정권이 추진하는 산업화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적 모순들을 치유하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WSCF가 제시한 “교회의 생명과 사명” 프로그램을 비롯해 다양한 주제로 연수회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기독학생운동의 통합을 위한 공동의 의제와 토론의 기반이 되었다.
1966년에는 KSCM 대학생 여름대회가 부산 수산대학에서 열렸으며, 주제는 ‘우리 민족의 장래와 기독교’였다. 김관석 목사가 강사로 나와 한국 기독교가 서구 신학과 교회의 전통을 모방하기보다는 우리의 주체적 신학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강연은 많은 학생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이후 ‘한국의 복음화’라는 구호 대신 ‘기독교의 한국화’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속에서 최성묵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김순이는 최성묵이 실무를 맡아 집행했던 사업들이 모금을 통해 예산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금이 되지 않을 경우 사업비의 많은 부분이 빚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김순이가 최성묵의 직장인 젠센기념관에 들렀고, 사무실의 여직원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간사님이 사무실에 있으면 고향사람들이 찾아오고, 항상 돈이 없다고 하면서 사정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주머니에서 털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순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살며 가정을 지켜나갔다. 그녀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가지고 불평하지 않고 근검절약하며 생활했고, 결국 천호동에 집을 장만하기에 이른다. 최성묵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기독학생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KSCC의 빚 문제는 점점 심각해졌다. 최성묵이 실무를 맡아 진행한 사업들은 모금이 실패할 경우 빚으로 남게 되었고, 결국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최성묵이 아닌 이사회와 이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김순이가 어렵게 마련한 천호동의 집도 처분해야 할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최성묵의 KSCM 간사 시절은 그가 기독학생운동 통합을 위해 어떤 열정과 헌신을 쏟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노력은 단순한 개인의 활동을 넘어, 한국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성묵과 김순이의 이야기는 희생과 사랑,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 어떻게 서로를 지탱해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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