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새해가 밝았다. 봄이 오고, 3·15 선거를 전후로 민중의 분노가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결국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는 거대한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 최성묵은 제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시대의 소용돌이는 그를 새로운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최성묵의 1960년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지만, 12월 14일 장남 혜승이 태어난 기록을 제외하고는 그 해의 사건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확실하다. 제천에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하던 그가 서울로 향하게 된 것은 4·19 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4·19 혁명은 한국교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부조리와 부정부패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박형규 목사는 4·19 혁명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회상했다. “1960년 4월 19일, 수많은 젊은이들이 뜨거운 피를 흘리며 혁명을 일으킨 것을 지켜보면서 제 삶의 관점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최성묵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김재준 박사의 영향을 받아 현실 참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기독학생운동의 실무에 뛰어들게 된 것은 4·19 혁명으로 인한 기독교계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최성묵이 서울에서 KSCM(한국기독학생회 전국연맹)의 간사로 일하게 된 것은 1961년 1월 이전으로 추정된다. 당시 차선각 목사는 최성묵을 이렇게 회상했다. “KSCM 겨울대회에서 만난 최성묵 간사는 학생들이 불만을 토로할 때 다소 격렬하게 반응하며 ‘야, 이 새끼들아’라고 소리쳤습니다. 그의 모습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최성묵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은 ‘최핏대’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그가 원칙과 신념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최성묵은 당시 매우 활기차고 동적인 사람으로, 기독학생운동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성서를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 정치적 정황에 비추어 분석하며 학생들에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제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기독학생 후배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최성묵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최성묵이 핏대를 세운 것은 그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재식은 그 시기를 회상하며 “1960년대는 학생들과 군인들이 대치하고 대결하던 10년이었다. 최성묵 목사와 나는 기독학생운동의 실무직원으로 뛰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열정 하나로 버텨야 했고, 최성묵은 그 궂은 일을 감당하며 기독학생운동을 이끌었다.
1961년 5월,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기독교계는 또 한 번의 충격을 맞았다. 자유당 정권 때와는 달리, 교계에서는 군부의 원대복귀를 종용하고 민의에 의한 정치 구현을 강조하는 재야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최성묵과 함께 일했던 박상증은 군정 시절 재야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며 느낀 점을 회상했다. “최고회의 의장은 박정희 소장이었고, 우리는 그에게 전해야 할 성명서를 붓글씨로 써야 한다는 재야 어른들의 주장 때문에 시내 대서방을 찾아다녔다.” 이러한 경험은 그들에게 큰 압박과 긴장감을 안겼다.
4·19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군정세력에 저항하는 반독재 민주화의 요구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시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독학생운동도 그러한 기운을 받아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최성묵은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데 기여했다.
결국, 최성묵의 기독교학생운동 참여는 단순한 개인의 신념을 넘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중요한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며, 민주화의 길을 열어가는 데 헌신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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