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 목사님과 함께한 인간적인 이야기

선생님은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경북 포항시 위에 위치한 흥해읍의 유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나신 선생님의 어머님은 시집 와서 아버지와 함께 가정을 기독교로 개정하셨습니다. 어머님은 보통 분이 아니셨던 것으로 짐작되며, 선생님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었습니다. 그 후 시간이 흐른 후 노후에 뵙게 되었을 때 그 모습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선생님은 포항제일고등학교 3학년 학도호국단 단장 시절, 6.25 전쟁을 통해 경험하신 이웃 사랑에 대한 여러 사례를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민군이 고향을 점령하여 선생님을 포함한 여러 유명 인사들이 공개 총살형을 당하는 상황에서, 선생님은 하염없이 울부짖는 새벽 풀벌레 소리에 눈을 뜨고, 총상으로 피범벅이 된 몸으로 간신히 총살 현장을 기어 나와 지나가던 소달구지에 실려 가족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죽은 줄 알았지만 혼자 살아남은 선생님은 한 여학생(현재의 부인)과 그 집안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인민군 야전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 전투 이후, 국군의 북진으로 점점 부대가 후퇴하게 되면서 고향이 멀어지는 신세가 되셨습니다. 어느 가을날, 귀뚜라미가 울고 달빛이 대지를 덮을 때 선생님은 자신도 모르게 찬송가를 소리죽여 불렀습니다. 그때 간호사가 다가와 최 선생! 예수쟁이야?”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당황하며 긴장한 목소리로 , 조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간호원은 나도 옛날에는 조금 믿었다라고 말하며 웃으며 지나갔습니다.

그 후, 선생님은 초겨울 강원도 남쪽에서 미군 폭격으로 혼란스러운 야전병원에서 탈출하여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사경을 헤매던 선생님은 충청도 어느 곳에서 국군 부대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복장은 남루한 인민군 야전 작업복이었고, 총상의 휴유증으로 곱사등이 되어 있던 선생님의 모습은 국군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소대장은 여러 병사들 앞에서 당신이 정말 인민군이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나는 인민군이 아니라, 대한민국 포항제일고등학교 3학년이며, 크리스찬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소대장은 그렇다면 당신이 알고 있는 찬송가를 한번 불러보라고 했고, 선생님은 총상으로 아픈 허리를 움켜잡고 힘껏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때처럼 죽을 힘을 다해 찬송가를 부른 기억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소대장은 고맙게도 국군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약간의 용돈과 작전 지역까지 후송해 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선생님은 고향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군과 미군이 찾아와 동네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선생님에게 적색 분자나 부역자를 찾아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의 아버지(흥해교회 장로님)성묵아! 원수를 사랑해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공회당에 늘어선 많은 사람들 앞을 지나면서도 한 사람도 잡아내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이 지나갈 때, 부역 대상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이후 어떤 마음으로 인생을 살았을까요?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몇 십 년이 지난 1970년 초, 선생님께서 부산 YMCA 총무로 재직하실 때, 미국 USIS 학생과장이었던 담당자가 최 선생! 당신의 경력 조사와 태어나서 지금까지 맺었던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선생님을 미워하는 사람이 왜 한 사람도 없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후 선생님은 흥해읍에서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물리대 수학과에 진학하셨습니다. 재학 시절,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같은 교회 교인이었던 지금의 사모님과 결혼식을 올리셨습니다. 당시의 결혼식은 구리 반지 하나로 간소하게 치러졌습니다. 사모님 말씀에 의하면, 처음 살림은 냄비와 숟가락 몇 개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집안의 박해와 가정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선생님은 서울대학 3학년을 휴학하고 포항으로 내려가 포항고교에서 교편을 잡으셨습니다.

그 당시 자유당 독재 시대, 선생님은 우연히 1953년 한국기독교장노회와 한국신학대학을 설립하신 김재준 박사가 포항에서 설교할 장소를 찾기 힘들다는 소식을 듣고, 외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학교 강당을 제공하기로 하셨습니다. 이때 김 박사님의 설교를 듣고 설득을 받으신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수학과 졸업의 미련을 버리시고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서울에서 학생과 청년 중심의 기독교 운동을 주도하시며, 주변의 추천으로 연세대학교 감리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 이후 한국신학대학교에서 구약 분야 교수직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하셨습니다.

서울 생활은 가난하고 어려운 연속이었지만, 박상증 선생과 오재식, 차선각 선생 등 친구와 후배들이 힘을 합쳐 KSCF 전신인 SCM 총무직을 수행하며 한국 기독 청년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박상증 선생은 선생님이 음악을 무척 좋아하셨다고 전하며, 자신이 기르고 있던 전축을 부러워하셨다고 했습니다. 마침 박 선생님이 스위스로 가시게 되어 전축을 저렴한 가격에 선생님께 팔았습니다. 선생님 사후, 서울에서 만났을 때 내가 어려운 친구에게 선물을 주지 못한 점이 지금 생각하면 후회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선생님은 이화여고 교장을 지낸 J씨 등 여러 인사들과 함께 청년 기독 단체를 결성하고 왕성한 활동을 지속했지만, 후원보다는 활동 비용이 많아지면서 후원하겠다는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되어 빚이 늘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선생님이 살던 집의 전세 비용으로 단체의 빚을 몰래 갚고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많은 이들의 희망과 용기를 상징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적인 면모와 따뜻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셨고, 우리는 그 가르침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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