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 배방면과 맹씨 고택: 충절과 효의 상징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은 역사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지역입니다.

이곳은 맹씨 고택이 위치한 곳으로, 충절과 효의 상징인 맹희도와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배방면의 지리적 특성과 맹씨 고택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배방면의 지리적 위치
배방면은 아산시의 동남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배방읍의 중심지인 공수리에 읍사무소가 있습니다. 이 지역은 봉강천을 경계로 서쪽의 배방읍내와 동쪽의 신도시권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 모산역을 중심으로 아파트가 많이 지어졌고, 장재리에 위치한 천안아산역을 중심으로 아산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교통의 요지로서, 국도와 고속도로가 인접해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며, 대중교통도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배방이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운 방씨와 관련이 있으며, 맹사성 일가의 고택이 있는 아산 맹씨 행단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맹씨 고택과 그 역사
맹씨 고택은 한산면 축동리에 위치해 있으며, 충절과 효를 기리는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축동리는 한산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맹골이라는 이름은 맹씨들이 살았던 골짜기를 뜻합니다. 현재는 맹씨 가구는 없지만, 여전히 오래된 비석들이 남아 있어 그들의 역사를 말해줍니다.

비석 중 하나는 1392년에 세워진 맹희도의 효자리 비이며, 또 하나는 1399년에 세워진 맹사성의 효자리 비입니다. 이는 맹희도가 이 지역에 한동안 거주했음을 보여줍니다.

맹희도와 최영 장군의 특별한 인연
맹희도는 후에 온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이는 최영 장군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입니다. 맹사성의 부인은 최영 장군의 손녀로, 두 집안은 오랜 교류가 있었습니다. 맹사성이 최영 장군의 집의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먹으려다 혼이 난 일이 계기가 되어 두 집안은 사돈지간이 되었습니다.

온양의 맹씨행단은 최영 장군의 아버지 최원직이 지은 집으로, 최영 장군도 이곳에서 살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영 장군이 처형된 후 그의 자식들은 화를 입어 온양 집이 황폐해졌습니다. 이후 맹희도는 이 집을 개수하며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세덕사와 맹씨 가문의 유산
맹씨행단에는 맹유, 맹희도, 맹사성 3대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가 있습니다.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제사를 지내며, 2004년부터는 양력으로 제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세덕사에 모셔진 맹유의 위패는 일제강점기 두문동 서원에서 모셔온 것입니다.

맹희도의 묘는 아산시 법곡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조는 1750년 온양으로 행차하면서 맹희도의 묘가 부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는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이라는 현판을 내리며 맹씨 집안의 충효와 청렴함을 기렸습니다.

결론
맹씨 고택과 그 주변 유적들은 조선 시대의 충절과 효를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맹희도의 삶과 그의 후손들이 남긴 업적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유산은 후대에도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충남 아산시 배방면은 역사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며, 이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함께 지켜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맹씨 고택의 의미를 되새기고, 충절과 효의 정신을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