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함씨와 함부열: 충성과 역사 속의 명문가

강릉 함씨(江陵咸氏)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 함규(咸規)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강릉 함씨의 뿌리와 그들의 충절, 그리고 형제인 함부림과 함부열의 다른 충성의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강릉 함씨의 뿌리
강릉 함씨의 시조는 함혁(咸赫)으로, 그의 출신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 중국 한나라에서 건너왔다는 동래설(東來說)과 둘째, 마한(馬韓)의 부족장이었다는 토착 세력 설입니다. 함규의 후손인 함제(咸濟)가 강릉으로 이주한 후, 후손들은 양근함씨(楊根咸氏)에서 분적하여 함제를 시조로 삼고 강릉을 본관으로 삼았습니다.

함기주 전 종친회장은 "함씨의 본관을 강릉과 양근으로 구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며, 모든 자손이 하나의 뿌리 아래에서 갈라졌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한 함왕성이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에 존재하며, 이는 강릉 함씨의 역사적 근거로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문중의 번창: 함규와 함제 형제
드라마 “왕건”에서 등장하는 함규는 태조 왕건을 지원하여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몽골 침략에 대항해 큰 전공을 세우고, 후손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백봉령에 전승비를 세웠습니다. 함규는 시조의 21세손으로, 사후에 양후공(襄厚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함규의 후손인 함제는 강릉에 정착하여 지역의 명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함제는 강릉 최씨, 김씨와 함께 영동의 명문가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그의 기여로 인해 본관이 강릉으로 개관되었습니다. 함씨의 뿌리는 하나이며, 함왕의 자손이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부림과 부열: 두 형제의 다른 충성의 길
함부림(咸傅霖)과 함부열(咸傅說) 형제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형인 함부림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의 공신이 되었고,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역임했습니다. 그는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충성은 조정의 일원으로서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동생 함부열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지키며 두문불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공양왕이 원주로 퇴출당했을 때 그를 가까이에서 모셨고, 간성으로 유배될 때도 함께했습니다. 함부열의 충성은 개인적인 신념과 의리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왕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헌신했습니다. 이로 인해 두 형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충성을 다했지만, 모두 국가와 왕실에 대한 깊은 충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공양왕과 함부열의 묘소
함부열은 공양왕의 무덤 아래에 묻히게 되었고, 이는 두 사람의 충절을 상징합니다. 고성산 원정동에 위치한 공양왕릉은 그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기억하게 합니다. 함씨 문중에서는 공양왕이 궁촌리에서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함부열이 공양왕을 빼돌렸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수타사와 강릉의 풍수적 요소
수타사는 공양왕 시해 이후 국운이 다하자 방벽에 빈대가 들끓기 시작하여, 7층 석탑만 남기고 불상은 현재 홍천 동면으로 옮겨졌습니다. 수타사는 강릉 지역의 역사와 풍수적 요소가 어우러진 중요한 장소입니다.

결론
강릉 함씨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들을 기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충성과 희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강릉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가는 데 있어, 함씨 가문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며,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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