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씨와 김자수: 죽음으로 지켜낸 가문의 절개

김자수(金自粹)는 고려 말 충신의 상징으로, 그의 절개와 희생정신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는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며, 죽음을 통해 자신의 충절을 실천했습니다. 그의 묘는 경기도 분당 서현역에서 광주시 오포읍으로 넘어가는 태재마루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충절을 지킨 선택
김자수는 태종 13년(1413) 11월 14일, 형조판서로 부임하라는 전갈을 받고 고향 안동에서 한양으로 가던 중 독약을 준비한 상태였습니다. 벼슬을 받으면 고려를 향한 충절을 저버리는 것이었고,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진퇴양난의 처지였습니다. 그는 추령에 이르렀을 때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다. 오직 신하의 절개를 다할 뿐이다”라고 선언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절명사에는 충성과 효성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平生忠孝意 평생토록 지킨 충효 
今日有誰知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一死吾休恨 한 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만은 
九原應有知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김자수의 마지막 순간은 한양으로 가는 길과 정몽주(鄭夢周) 묘가 가까운 태재에서 맞이했습니다. 한양으로 가느냐, 정몽주의 길을 따르느냐의 갈림길에서 후자는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효와 충의 상징
김자수는 충신이면서도 지극한 효자였습니다. ‘삼강행실록’에 그의 효행이 전해질 정도로 효자의 표본으로 여겨졌습니다. 1351년에 태어난 그는 10세에 아버지를 잃고, 20세에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고, 그녀의 수명을 연장시키지 못한 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습니다.

문익점은 그의 효행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始見安東居堊子 처음에 안동에서 악차(堊次·무덤 옆의 뜸집)에 있는 사람 보았는데 
剖氷求鯉自恢恢 얼음 깨고 잉어 구하여 무척 기뻐하더구먼. 
筍生雪裏誠心厚 눈 속에서 죽순이 난 것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함인데 
雉下苦前孝烈開 거적자리 앞의 꿩이 내린 것은 효열(孝烈)의 열림이지.
김자수의 효행과 시묘살이한 묘소 주변은 ‘시묘동(侍墓洞)’이라 불리며, 그의 고향에는 ‘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라는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후손의 노력과 유산
김자수의 묘는 비석을 세우지 않기로 하여 눕혀두었지만, 그의 후손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김자수의 동네에 세운 효자비 비각에는 순조 18년(1818)에 김노경(金魯敬)이 짓고 그의 아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직접 쓴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김정희는 김자수의 15대손으로, 그의 묘를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안동댐이 생기면서 김자수의 효자비는 안기동으로 옮겨졌고, 이제는 아파트 단지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조선 왕조에서도 벼슬을 하였고, 그의 유산은 여전히 지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강릉판관 김영년 묘의 풍수적 특성
충북 영동에 위치한 강릉판관 김영년(金永年) 묘는 김자수의 손자로, 풍수적으로도 많은 특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묘는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단전리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현무봉(玄武峰)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좌선룡(左旋龍)의 형세를 가지고 있으며, 쌍기맥(雙氣脈)으로 출맥하는 내룡(來龍)이 특징적입니다.

김영년의 묘소는 안산인 탐랑봉(貪狼)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귀인사(貴人砂)로 작용하여 후손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줍니다. 특히, 묘소의 후손들은 이 묘역의 정수리인 천심십도(天心十道)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풍수적으로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결론
김자수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강한 충절의 상징입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충성과 효의 가치를 후대에 전하는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앞으로도 김자수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를 기리는 노력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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