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열家: 권력과 배신의 아이러니

김치열은 1921년 9월 15일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서 태어나 2009년 6월 15일, 향년 88세로 사망한 인물이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에서 권력과 배신의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가문, 김치열家의 복잡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치열은 사성 김해 김씨의 후손으로, 그의 조상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왜장 사야가로, 조선에 투항하여 김해 김씨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300년 후, 김치열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오르게 되며, 이는 그가 남긴 유산의 시작을 알린다.

그는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법조계에 발을 들였다. 이승만 정권 시절, 서울지검장과 중앙정보부 차장을 역임하며 권력을 쌓았다. 특히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된 논란에 휘말리며 검찰총장으로 영전하게 된다. 인혁당 사건에서는 억울한 생명을 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 검찰이 사형을 구형할 때 검찰총장이었다.

김치열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만든 인물로, 그곳에서 수많은 인권 침해가 발생했다. 내무부 장관 시절, 그는 박정희 정권의 특명사건을 수사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었고, 200억 원의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는 각서를 썼다. 그가 빼앗긴 땅은 현재 수천억 원이 넘는 가치로 상승했다.

김치열은 국가를 상대로 준재심 청구소송을 걸어 승소판결을 받았고, 이는 그가 과거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비춰졌다. 그는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요청을 지병을 핑계로 거부했지만, 자신의 재산 찾기에는 열심이었다. 2001년부터 죽는 시늉을 하며 엄살을 떨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교활한 인물인지 보여주었다.

김치열家는 군벌, 관료, 재벌, 언론, 서울대 학벌이 얽힌 복잡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그의 큰 딸 김윤희는 인제대 석좌교수 백낙서와 결혼하였고, 둘째 딸 김영경은 농림부 차관을 지낸 김종대의 아들과 결혼하여 효성그룹과의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큰 아들 김형국의 부인은 조양상선 그룹 박남규 회장의 딸로, 막내딸 김혜림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서봉균의 아들과 결혼하였다.

이렇듯 김치열家는 대한민국의 수구기득권 세력으로, 친일세력을 계승하는 집단으로 비춰진다. 그들의 불행한 과거는 단순히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후손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다. 김치열의 과거와 현재는 한국 현대사의 복잡한 정치적 맥락을 반영하며, 그가 남긴 유산은 권력과 부의 음습한 연결고리로 여전히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