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유대 독립전쟁과 바르 코크바의 난: 저항의 역사

서기 66년 여름, 로마 총독 플로루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건은 유대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맞서 봉기를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고, 카이사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일어난 이 봉기는 제1차 유대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인의 독립운동에 가담하라는 압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여 요르단 강을 건너 펠라로 피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의 간극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와 에피파니우스의 《반이단론》에서도 언급됩니다.

전투의 경과
전쟁의 상황은 급속도로 전개되었습니다.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68년 6월 21일 예리고를 탈환하고, 이어서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강력한 저항을 시도했지만, 로마의 군사력은 압도적이었습니다. 결국 70년 유월절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4개 여단(약 2만 4,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티투스는 8월 29일 성전구역을 점령하고 성전을 불태우는 잔혹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성전의 파괴는 유대인들에게 큰 상실감을 안겼으며,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어서 9월에는 예루살렘 서북부 고지대와 헤로데 왕궁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유대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는 로마의 전략적 공격이었습니다.

마사다의 저항
그러나 사해 서안에 위치한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저항군이 마지막까지 버텼습니다. 이들은 74년 유월절까지 저항하며 로마군에 맞섰습니다. 하지만 결국 실바 장군 휘하의 로마군 제10여단에 의해 점령될 지경에 이릅니다. 마사다에서 자객 960명은 포로가 되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는 유대인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지게 됩니다.

바르 코크바의 난
서기 13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반유대 정책을 강화하자 유대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예루살렘의 폐허 위에 신도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와 유피테르 신전의 건설이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바르 코크바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랍비 아키바에 의해 메시아로 선언되었고, 유대인들은 그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은 서기 132년 여름 또는 가을에 시작되어, 유대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초기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에 주둔한 로마군을 압도적으로 물리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로마군의 총공세
바르 코크바의 군대는 여러 동굴에 작전 기지를 세우고 유격전술을 통해 로마군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군의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었고, 전투는 점차 격렬해졌습니다. 로마군의 초토화 전략은 유대인 공동체에 큰 피해를 주었고, 많은 유대인이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결국 135년, 바르 코크바의 난은 진압되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영구히 추방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역사적 비극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결론
제1차 유대 독립전쟁과 바르 코크바의 난은 유대인 저항의 상징적 사건으로,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압박에 맞서 싸운 저항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과 역사적 기억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현대 이스라엘에서도 이들의 이야기는 민족적 자긍심과 저항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러한 저항의 역사는 오늘날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민족적 자부심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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