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 교수는 1974년과 1980년,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의 기억을 통해 한국 역사에서의 중요한 순간들을 회고합니다. 힌츠페터는 한국에서의 군사독재와 인권 탄압을 세상에 알린 인물로, 그의 역할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74년, 첫 만남
1974년, 손 교수는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9월,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독일 기자가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독일연방공화국 제1공영텔레비전방송(ARD)의 도쿄 특파원으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힌츠페터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억압과 인권 탄압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의 방문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힌츠페터는 명동성당에서 열린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치적 미사를 취재하며, 군사독재에 맞선 한국 교회의 정치 참여를 기록했습니다. 이 미사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정치적 저항을 시작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광주의 참상과 힌츠페터의 역할
1980년, 한국은 다시 한 번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군부통치를 지속하려 하면서, 국민들의 저항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5월 18일,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광주 학살로 알려지게 됩니다.
힌츠페터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취재하여 독일의 방송을 통해 전세계에 알렸습니다. 그의 보도는 광주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많은 이들이 그 잔혹함에 경악하게 됩니다. 손 교수는 이 시기에 힌츠페터와 함께한 경험을 회상하며, 그가 어떻게 한국의 현실을 세계에 전달했는지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광주 사건의 기억과 교훈
힌츠페터의 노력으로 광주 사건은 국제 사회에 알려졌고, 이는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손 교수는 그가 촬영한 사진이 담긴 <분테>라는 여성잡지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단순한 뉴스 보도를 넘어,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교수는 힌츠페터가 남긴 유산을 통해 오늘날 한국인들이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광주에 잠든 힌츠페터의 명복을 빈다고 하며, 그의 희생과 노력에 대한 경의를 표합니다.
결론
손규태 교수의 회고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힌츠페터의 용기와 헌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우리는 그를 통해 역사적 진실을 마주하고, 더욱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야 할 책임이 있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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