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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고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의 특별기고를 통해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핵심 메시지인 "믿음만으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2017년 5월 13일에 발표된 이 기고문은 루터의 신학적 통찰을 현대의 교회와 세계의 현실에 비추어 살펴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루터의 종교개혁과 "믿음만으로"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핵심으로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구원이 오직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개념으로,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루터의 이 주장은 교회의 권위와 전통에 도전하며, 신자 개인의 신앙적 자율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루터는 신자들이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고, 그 ..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고 손규태 교수의 "하나님의 의와 은총"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종교개혁 설교를 통해, 마르틴 루터의 신학적 통찰과 그 현대적 적용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2017년 10월 29일에 진행된 이 설교는 로마서 3:21-31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의 의와 은총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하나님의 의손 교수는 루터가 로마서를 통해 발견한 하나님의 의의 개념을 강조했습니다. 루터는 "인간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의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의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잊..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종교개혁의 아이콘, 마르틴 루터와 그로 인해 탄생한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해요. 종교개혁이란 단순한 종교적 변화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낸 중요한 사건이었답니다. 그럼, 술 한 잔과 함께 루터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루터의 종교개혁: 과연 무엇이 문제였나?16세기 초,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부패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교회 성벽 정면에 종이 한장으로 무장했습니다.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그는 95개 조항을 교회 정문에 게시했죠. 그러나 그 파장은 엄청나게 컸습니다.이 조항들은 면죄부 판매와 같은 교회의 부정행위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기대했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자, 루터는 교회의 여러 행태를 공개적으로 ..
고 최성묵 목사님은 인간적인 면모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는 경북 포항시 위에 위치한 흥해읍의 유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기택 민주당 전 총재는 흥해 위의 청하 출신이며,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동향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유교 집안에 시집오셔서 아버지를 흥해교회 장노님으로 올리셨는데, 이는 그가 상당히 개화된 분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합니다.최성묵 목사님은 당시 대학생이던 나에게 이웃 사랑에 대한 사례로 포항제일고등학교 3학년 학도호국단 단장 시절의 경험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1950년 6.25 전쟁 중, 인민군이 고향 흥해와 포항을 점령하면서 그는 반동적인 요소로 여겨져 공개 총살형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는 총살 집행을 당한 후, 하염없이 울부짖는 새벽 풀벌레 소리에 눈을 ..
최성묵 목사님은 서울에서 학생과 청년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기독교 운동에 참여하시며, 주변의 추천으로 연세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 이후 한국신학대학교 구약 분야 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셨습니다. 그의 서울생활은 집안의 반대와 박봉으로 인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그의 끼는 결코 숨길 수 없었습니다.서울 의대의 박상증 선생과 차선각, 오재식 선생 등 친구들과 후배들은 힘을 합쳐 KSCF의 전신인 SCM 총무직을 수행하며 한국 기독청년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박상증 선생은 "최선생은 평소 음악을 무척 좋아하셨다"고 회상하며, 자신이 가진 전축을 부러워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얼마 후, 박상증 선생이 스위스 WCC로 부임하면서 차비 부족으로 저렴한 가격에 전축을 최성묵 목사님에게 판매했습니..
1974년 12월, 유신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우리는 학생과 청년들로 구성된 51명으로 제주도 행군 대회를 주최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의 목적은 유신 정부가 지원하던 사회 운동 단체의 학생 행군 대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녀 학생들은 섬나라 일주 행군을 하며 혼숙(?)을 하고, 13박 14일 동안 젊은 날의 좋은 추억을 만들어 빠른 시간을 보냈습니다.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서귀포에서 저녁 휴식시간에 선술집에서 많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던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술잔을 들며 “유신 반대!”를 외쳤고, 그 자리에 모인 손님과 집주인 모두가 유신 반대를 위한 집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술집 주인은 많은 부분 술을 공짜로 주는 헤프닝도 벌어졌습니다. 이후 이 모임은 부산 YMCA 중심의 젊은이 ..
선생님께서 담임목사로 계시던 중부교회는 정말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암울했던 유신과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시국을 논의하고 고민을 표출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중부교회는 최성묵 목사님을 중심으로 전국의 청년들과 기독교 장로교회 교인뿐 아니라, 예장, 고신, 감리교 등 다른 교파의 지도자들, 타 종교의 성직자들, 심지어 무신론자들까지도 모여 선생님과의 친교를 나누고 대화를 통해 용기와 안식을 찾았습니다.김영삼, 김대중, 이기택, 박관용 등 당시 야권의 정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정의에 반하는 판결에 맞서 싸우던 김광일, 노무현, 이흥록 변호사,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지성인들인 함석헌, 김정준,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홍근수 목사, 한완상 교수,..
선생님께서 바라신 세상은 메마른 조국의 땅에 새로운 희망과 꿈, 민족 통일이 이루어지고 정의의 물결이 넘치는 나라였습니다. 언제나 바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인권의 나라, 소외받지 않는 민중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나라, 우리의 민족이 세계의 희망을 만드는 나라를 꿈꾸셨습니다.역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소유물"이라고 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요. 선생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저의 지나온 생각들을 어떻게 판단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진심으로 이 글을 옮깁니다. 김순이 사모님께서는 아내와 상의하여 분당 야탑동으로 이사 오신 지 꽤 되었고, 현재 막내아들과 함께 거주하고 계십니다. 집사람과는 자주 대화를 나누지만, 정작 저는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있어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민주화 과정에서 "부마항쟁..
선생님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행동적인 신학자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세계적 흐름과는 달리 교회 공동화 현상에 빠지며, 초강세 교세 유지와 이를 바탕으로 오만과 편견을 가지는 것을 개탄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바리사이파를 향해 “뱀같이 사악한 무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았습니다.선생님은 성경의 축자영감설이나 무오류설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 말씀과 교회의 목사님의 말씀을 혼돈하는 현상을 비판하셨습니다. 중세 말, 면죄부를 팔아먹는 형상의 종말론으로 나아가는 현실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하셨습니다. 또한, 타종교와 협력하지 못하는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셨고, 종교의 다원주의보다는 이웃 종교와 대화를 강조하는 신앙관을 유지하셨습니다. 서구의 종교적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의 유신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법과 정의가 무너지고 많은 학생과 청년들이 원하지 않는 감옥으로 가는 사건이 잇따랐습니다. 이 시기에 선생님은 시대적인 양심과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적 현실과 사명감에 부딪치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을 향해 바른 말을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으며, 목회자의 길로 가겠다.” 그리고 선생님은 부산YMCA 총무직을 사임하시고 중부교회 전도사로서의 새로운 길을 시작하셨습니다.저는 솔직히 예수님보다 선생님이 더 좋아서, 전 가족이 기독교인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내와 의논하니 쾌히 동의해 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처음 목회자로서 세례를 주시던 날, 저는 조인두 ..
필자는 선생님이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던 날, 두 가지 사건을 잊지 못한다. 첫 번째는 문익환 목사님께서 추도사를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그분은 “제자인 최목사처럼 민주화를 외치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예언처럼, 문익환 목사님도 몇 년 뒤 통일운동에 전념하시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다. 또 하나의 잊지 못할 기억은 영결식장에서의 중부경찰서 소속 황형사님이다. 그는 중부교회 담당 형사로, 10년 이상 부목사 자격으로 주일 대예배 시간마다 맨 뒤편에 앉아 예배를 보조하며 설교 내용을 요약하여 상부에 보고하던 분이었다. 그날, 황형사는 선생님께서 돌아가시던 날 가장 많이 서럽게 눈물을 흘리셨다.평소 선입감이 좋지 않았던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을 보내드리며 “..
필자는 지금까지 부모님을 제외하고,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잊지 못할 두 사람을 기억한다. 한 분은 나의 형수님 이정희이고, 또 한 분은 1971년 겨울 YMCA 지하다방에서 처음 만나, 청년기 이후 지금까지도 나의 인생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계신 고 최성묵 목사이다. 그간 대책 없이 숨가쁜 인생을 살아왔지만, 선생님을 생각하는 마음앞에서는 흥분되는 자신을 감추기가 힘들다. 선생님의 일상적인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젊은 시절 나를 매료시킨 그분이 나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정신적인 탯줄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선생님을 잊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나의 인생에 감동과 흥미, 그리고 충격과 교훈을 주었다”는 이기적인 동기에서만 출발한 것은 아니다. ..
80년대 전두환 정권을 지나 노태우 정권 시절, 동구권의 변화와 소련과의 수교에 따른 북방 정책 추진 과정에서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통일 문제에 대해 많은 식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는 통일 문제에 있어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는 상황을 우려하며, 정책 당국자나 정치인들의 노림수, 통일 반대론자들의 조직적 저항으로 인한 국민적인 분열을 걱정하셨습니다.특히 선생님은 독일의 통일 과정을 지켜보며 부러움과 함께 남북 평화와 통일 한국을 위해 많은 생각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의 남북관계 기본 원칙과 통일관은 당시 매우 진보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남북 대결 관계를 평화적인 통일로 정착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전제를 두고, “지구상 냉전의 마지막 장을 이 땅에서 매듭짓기 위해서는 독일의 ..
80년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가 격변하던 시기에, 선생님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치에 참여하셨습니다. 민추협 이후, 전두환 정권 하에서의 민주화 과정에서 김광일 변호사, 노무현 변호사, 김재규 형에게 공천권을 주셨습니다. 두 분은 출마하였지만, 김재규 형은 선거 자금 문제로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 선생님은 김영삼과 김대중 두 분의 대통령 출마를 위한 후보 단일화 작업에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하지만 두 지도자가 각자의 길을 갈 때, 선생님은 김대중 노선의 맨 앞자리에 서셨습니다. 이후 선생님은 현직 목회자로는 최초로 평민당 부총재를 역임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한 정치적 참여가 아니라, 지역 민주화를 위한 지방자치 정부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