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 30일, 최성묵 목사님은 중부교회에서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셨다. 이날 설교는 요한복음 8장 1절에서 11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사건을 통해 죄와 용서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시간이 되었다.
설교의 시작에서 목사님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바리사이파들이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와서 심판을 요구한 사건을 설명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한 올가미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 유대법에 따르면 간음한 여자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고, 이 여자의 죽음은 이미 자명한 결과로 여겨졌다.
바리사이파의 질문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돌로 쳐 죽여라"는 측면은 사랑과 자비의 모순을 드러내며, 동시에 로마 당국과의 충돌을 초래할 수 있었다. 유대율법에 따라 여자를 죽일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쏠렸다. 그러나 만약 그 여자를 살려주면, 범행을 묵인하는 것이 되어 결국 죄의 경중을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목사님은 "죄에서 구원한다"는 주제를 통해, 죄의 개념이 추상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 죄는 현실적이며 부정적인 것이다. 간음한 여자의 인격이 아닌, 그녀가 가진 노동력과 재산의 가치가 문제시된 당시 사회의 시각을 비판하셨다. 여자는 단순한 소유물로 여겨졌고, 그녀를 범하는 것은 도둑질과 같았다. 이런 맥락에서, 여자의 위치는 매우 비참했음을 강조하셨다.
또한, 목사님은 신명기 24장 1절을 언급하며 이혼이 단순히 "인연을 끊는 것"이라는 축소 해석이 이루어졌음을 지적하셨다. 당시 사회는 결혼과 가정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가정의 파괴가 심각해졌다고 하셨다. 결혼은 단순한 계약이 아닌, 복합적인 생활 공동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단죄의 칼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안정성과 나약성을 이해하고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목사님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예를 들어, 감옥 속에서도 깊고 아름다운 존재를 찾으려는 시도를 강조하셨다.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녀 참된 공존의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죄인으로서, 용서받는 존재로 살아가게 한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녀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메시지이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기억하며,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용서받은 자로서 서로에게 용서와 사랑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단순한 법적 판단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실천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 용서를 실천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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