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은 후손을 낳고, 후손은 조상을 만든다.” 이 말은 고려 말 불사이군의 충신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실감하게 됩니다. 경북 영주시에 위치한 구성산 자락에는 조선 제일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집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현재 양옥으로 바뀌어 옛 자취를 찾기 어렵습니다. 이성계와 조선의 지분을 반반 나누어도 좋을 혁명가지만, 그의 옛터에 팻말 하나 없어 쓸쓸한 느낌을 줍니다.
이제 구성산의 주인은 정도전이 아니라 동시대에 살면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권정(權定, 1353~1411)입니다. 삼판서 구택터에서 구성산을 돌아들면 권정을 기리는 봉송대(奉松臺)가 있습니다. 그 벼랑 아래에는 권정의 신도비가 있으며, 그 안쪽에는 그의 정신을 기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각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구성산을 오르면 권정을 배향했던 구호서원(鷗湖書院)과 반구정(伴鷗亭)도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권정의 출생과 생애
권정은 안동 출신으로, 그가 살던 동네는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棄仕里)입니다. ‘벼슬을 버린 동네’라는 이름은 권정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이유에서 붙여진 것입니다. 그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안동의 태사묘에 배향된 권행(權幸)의 14세손입니다. 권정은 안동댐에 잠긴 예안면 북계촌에서 태어났고, 야은 길재와 동갑으로 함께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그는 충청도 괴산의 지군사(知郡事)를 역임하고, 내직에 들어 좌사간(左司諫)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보고로 외직인 김해부사로 옮겨졌습니다. 김해부사로 있는 동안 고려가 망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고려를 회복하려는 의지와 풍수
권정은 스스로 호를 사복재(思復齋)라 하여 고려를 돌이켜 생각하겠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그의 집 앞에 세운 정자는 반구정이라 하여 옛날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대를 이루어 세운 봉송대는 송도(개성)를 받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의 모든 호와 공간은 고려 왕조를 회복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성산은 높은 산과 맑은 물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지역으로, 풍수적으로 매우 유리한 환경을 제공합니다. 산은 외부의 해로운 기운을 차단하고, 물은 생명력과 기운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권정이 고려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 마을 주민들은 그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을 ‘지실어촌’에서 ‘기사리’로 바꾸었습니다. 권정의 묘는 기사리에서 멀지 않은 도목촌 옥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지만, 후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그의 행적은 오랫동안 잊혀졌습니다.
후손들의 노력
권정이 죽은 지 194년이 지난 후인 1605년에 후손들은 비문을 찾아내었고, 1785년에 깨진 비석을 복원하여 비로소 그의 묘와 행적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사위인 우홍균(禹洪鈞)의 ‘유사(遺事)’가 발견되었고, 우홍균은 장인 권정에 대해 “고려조에서 직간하던 고결한 절의의 선비였으며, 명리의 학문에 뛰어났다”고 기록했습니다.
결론
안동 권씨와 권정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들을 기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충성과 희생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권정의 정신과 그의 후손들이 세운 대와 정자는 고려 회복의 의지를 상징하며, 이 지역의 풍수적 특성과 함께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앞으로도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전통을 보존하는 노력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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