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부림사건과 부산미문화원 사건으로 민주화 운동이 큰 타격을 입었고, 중부교회 역시 그 여파를 고스란히 겪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최성묵 목사는 교회 내에서 발생한 내분 사태로 인해 심각한 갈등과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분의 발단은 여러 요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최성묵이 부림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배포한 유인물에 이름을 넣도록 했다가 나중에 발뺌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비록 그 사실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최성묵이 그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를 단순히 비난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많은 운동가들이 수사기관의 압박 속에서 거짓말을 하며 다른 사람을 보호하려 했던 것처럼, 최성묵도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성묵은 6월 항쟁 때 대열의 선두에서 학생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그는 경찰의 방해로 집회가 무산되자 분통을 터뜨리며 윗옷을 벗고 와이셔츠만 입은 채로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평소에는 온화하지만, 잘못된 상황을 보면 '최핏대'라는 별명처럼 진노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전통적인 성직자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운동가로서의 열정과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최성묵이 감옥에 간 학생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청년들과 교회 집사였던 모 기자의 비판에 대해서도 믿지 못하는 교인이 다수였습니다. 그가 대구의 백현국을 지원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고려할 때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달라 오해가 생길 수 있었지만, 이는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최성묵과 청년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그를 반대하게 되었고, 둘 사이에는 정보기관의 공작이 도사리고 있다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최성묵은 평소 청년들과 가까운 관계였기에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고, 이로 인해 상황을 다르게 이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문제는 교회 내에서 공방을 거듭하다가 10월 하순에는 청년들이 기독교 장로회 교회사회선교위원회에 문서를 보내고, 중부교회 당회가 이에 대해 해명하게 됩니다. 마침내 11월에는 최성 집사가 기독교 장로회 경남노회에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문제는 교단의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 고소장에는 여섯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첫째, 최성묵이 주초를 상습적으로 했다는 점, 둘째, 목사의 겸직 금지 위반, 셋째, 국민연합 사건과 부림사건과 관련된 배신행위, 넷째, 대관부 재정 문제, 다섯째, 노령의 권사에게 폭언, 여섯째, 사찰 집사를 무상으로 가사노동에 이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983년 5월 24일, 경남노회 재판국은 최성묵의 중부교회 담임 목사직 해임을 판결했습니다. 판결 이유는 그가 주초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위반하고, 이중직에 대한 허위 진술을 했으며, 회계장부 제출을 거부한 점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연합 사건과 부림사건과 관련된 배신행위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판결을 주도한 보수세력과 최성묵을 옹호하는 세력 간의 갈등은 교단 내에서 큰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최성묵을 지지하는 이들은 총회에 상소하며 반격을 시도했으나, 보수세력은 최성묵과 함께 부산신학교에 출강하던 다른 목사들도 이중직을 이유로 회원권을 박탈했습니다.
결국, 김기수 목사가 노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최성묵을 옹호하는 세력의 입지가 강화되었지만, 보수파는 다음 회의에서 선거의 무효를 주장하며 최성묵과 다른 목사들의 회원권을 계속 박탈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1984년에 가서야 최성묵의 해임과 회원권 박탈이 원상회복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최성묵의 건강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1980년 5월에 쓰러진 이후 겨우 회복되었지만, 다시 장출혈과 위출혈로 두 번의 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의 스트레스가 과중하다고 판단하여 신경선을 하나 잘랐다고 전해집니다.
중부교회 내분사태는 단순한 교회 내 갈등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과 그에 따른 압박 속에서 인간관계와 신뢰가 어떻게 깨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최성묵의 이야기는 그가 겪었던 고난과 갈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의 복잡한 감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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