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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군 와부읍 덕소리 석실 마을에는 신안동 김씨의 100년 세도 정치를 가능하게 한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김번(金번) 묘가 있습니다. 이 묘는 술병에 물을 가득 담아 놓은 형국인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으로, 혈판이 마치 옛날 술병과 같이 생겨 자연의 신비함을 자아냅니다. 묘 뒤는 술병의 주둥이처럼 생겼고, 여기서 내려온 입수룡은 술병의 목처럼 보이며, 묘가 있는 자리는 호리병의 몸통으로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명당을 바탕으로 안동 김씨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도 정치를 이어갔습니다.안동 김씨(安東 金氏)는 본관은 같으나 시조가 다른 두 파로 나뉘어 있습니다. 구안동(舊安東)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경기도 양주군 와부읍 덕소리 석실 마을에는 신안동 김씨의 100년 세도 정치를 가능하게 한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김번(金번) 묘가 있습니다. 이 묘는 술병에 물을 가득 담아 놓은 형국인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으로, 혈판이 마치 옛날 술병과 같이 생겨 자연의 신비함을 자아냅니다. 묘 뒤는 술병의 주둥이처럼 생겼고, 여기서 내려온 입수룡은 술병의 목처럼 보이며, 묘가 있는 자리는 호리병의 몸통으로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명당을 바탕으로 안동 김씨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도 정치를 이어갔습니다.안동 김씨(安東 金氏)는 본관은 같으나 시조가 다른 두 파로 나뉘어 있습니다. 구안동(舊安東)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경북 안동의 임청각(臨淸閣)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중 하나로,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입니다. 이곳은 500년의 기품이 흐르는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장소로, 고성 이씨는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하며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고성 이씨의 뿌리는 세종대왕 시대의 정치인 이원(李源)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원은 세종 시절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며 조선 왕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아들 이증(李曾)은 세조의 왕위를 찬탈한 이후 안동으로 이주하였고, 이 과정을 통해 고성 이씨의 정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이굉(李宏)과 이명이 임청각을 건립하며 가문은 더욱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임청각은 99칸의 규모를 자랑하며, "맑은 시냇가에 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
강릉의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은 허난설헌의 생가 터에 세워진 소박한 한옥으로, 이곳에서 허균 남매의 삶과 사상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념관 입구에 걸린 현판은 2006년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것으로, 허균 남매의 고뇌와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은 대관령 동쪽 영동 지역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태풍 루사와 매미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매화가 가장 먼저 피는 곳으로, 한고를 겪고도 청향을 발하는 매화처럼 변방의 창조성을 상징합니다.허난설헌은 조선 시대(1392-1910)에 태어난 여성으로,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허균(1569-1618)의 호민론은 조선 사회의 변혁 주체로서 민중을 강조하며, 백성을 항민, 원민, 호민으로 나누었습니..
조선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창발성을 발휘하였습니다. 이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이·기 논변’은 당시 우파와 좌파의 이념 논쟁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이황의 주리론 대계는 이성적인 것의 ‘절대가치’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며, 서경덕의 기일원론 체계는 우주 만물의 ‘운동의 원칙’을 주목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조선 사대부 문화와 사회는 새로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서경덕의 제자들 중 박순과 허엽이 있었지만, 기대승, 이이, 김장생에 비해 학문적 업적은 미미한 편입니다. 그러나 동인 당파의 영수 허엽의 자녀들 중에서는 사상과 학문의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허엽의 전실부인으로부터 큰아들 허성과 두 딸이 태어나고, 재취부인으로부터 허봉, 허초희, 허균이..
김치열은 1921년 9월 15일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서 태어나 2009년 6월 15일, 향년 88세로 사망한 인물이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에서 권력과 배신의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가문, 김치열家의 복잡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치열은 사성 김해 김씨의 후손으로, 그의 조상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왜장 사야가로, 조선에 투항하여 김해 김씨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300년 후, 김치열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오르게 되며, 이는 그가 남긴 유산의 시작을 알린다.그는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법조계에 발을 들였다. 이승만 정권 시절, 서울지검장과 중앙정보부 차장을 역임하며 권력을 쌓았다. 특히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된 논란에 휘말리며 검찰총..
“부자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경주 최부잣집은 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1600년대 초반부터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를 이어오며 만석꾼의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후손인 최준(1884-1970)은 1950년, 전 재산을 스스로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하며 역사의 무대 위로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300년을 넘게 만석꾼 부자로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최부잣집의 가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지켰습니다.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높은 벼슬에 오르면 집안에 화가 미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권력의 유혹을 경계하며, 겸손한 삶을 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재산은 1년에 1만석 이..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위치한 정온 선생의 고택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고택은 후손들이 여전히 거주하고 있으며, 그 역사와 풍수적 특성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정온(鄭蘊, 1569~1641) 선생은 영창대군을 처형하는 것이 인륜에 어긋난다며 상소한 후 제주도로 유배된 인물입니다. 이후 인조의 등극으로 경상도 관찰사와 부제학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는 이조참판으로 김상헌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덕유산에 들어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강천 마을은 거창과 함양을 잇는 3번 국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위천천을 따라 무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온 선생의 가옥은 뒷산을 배경으로 위엄 있게 자리잡고..
IMF 환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상류사회’라는 개념이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상류사회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해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류사회가 얼마나 존경받는 문화를 갖추고 있었느냐에 따라 사회의 안정과 구성원 전체의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는 한국의 소문난 명문가 15곳을 탐방하며 진정한 상류사회의 조건인 ‘명문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추적합니다. 저자는 명문가의 기준을 그 집안의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중심으로 설정합니다. 단순히 돈이 많거나 높은 벼슬을 가진 집안이 명문가가 아니라, 진선미(眞善美)에 부합하는 삶을 대대로 이어온 집안이 진정한 명문가라는 것입니다.저자는 고택(古宅)을 명문가의 실질적..
최종현(崔鍾賢, 1929년 11월 21일 ~ 1998년 8월 26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SK그룹의 회장으로, 그룹 창립자인 최종건의 동생입니다. 그의 경영 철학과 성장은 한국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그의 가족과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최종현의 생애, 경영 역량, 가족 상황, 후계자 최태원의 비전과 미래 전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최종현은 1929년 경기도 수원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4남 4녀 중 차남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무장사를 하며 학비를 마련했고, 최종현은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갔습니다. 수원 세류소학교를 졸업한 후 동성상업학교에 진학하였으나, 한국 전쟁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위치한 오죽헌은 조선 중기의 가옥으로,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이곳은 단종 시절 병조 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집으로, 한국 주택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죽헌은 특히 이이(이이)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며, 그의 탄생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인해 주변 환경이 많이 변화하여, 원래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오죽헌의 입지환경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마명산에서 북진하던 용맥이 오죽헌의 주산에 이르러 몸을 동동방으로 틀어 죽헌천과 난곡천 사이를 뚫고 뻗어왔습니다. 오죽헌을 감싸고 있는 자연은 우측에서 흘러온 오죽천이 둥글게 감싸안은 뒤, 주산 뒤..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한 선교장은 조선 사대부의 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역사적인 고택입니다. 이 집은 뱃머리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집터 덕분에 '선교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내번(이내번)이 지은 이 고택은 후손들이 여전히 거주하고 있어, 그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선교장은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과 정자인 활래정(活來亭) 등 여러 건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열화당은 1815년에 이후(이후)가 건립하였고, 활래정은 1816년에 이근우(이근우)가 중건하였습니다. 이 고택은 안채,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사당, 정자, 행랑채 등 다양한 구조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대표적인 예로 손꼽힙니다.선교장의 배치는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서남향을 향하고 있..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김성수입니다. 그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태어나, 계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으로서 제2대 부통령으로 재임한 인물입니다. 김성수는 유교적 전통을 중시하는 가문에서 성장하였으며, 조선시대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의 13대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김경중은 군수로서 교육에 힘쓰며, 김성수에게 교육과 계몽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김성수는 중앙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친구 송진우와의 깊은 유대감을 쌓았습니다. 1908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유학 시절 민족 자각의 필요성을 느끼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
김동조는 한국 현대사에서 복잡한 외교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그의 경력과 한일협정 체결 과정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경남 통영 출신인 그는 부산을 거쳐 일본 큐슈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정부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저항하는 한국인들을 일본에 밀고하는 역할로 비판받았습니다.전후에는 미군정을 위해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배급하며 이승만 정부 하에서 외무부 차관으로 승진했습니다. 이후 군사 쿠데타 이후에는 여당과 중앙정보부의 외교 고문으로 복귀하여,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에 기여하며 첫 주일 한국대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외교 경력은 일본과의 유착과 부정적인 이미지로 점철되었습니다.김동조는 대사 재직 중 일본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준 매수꾼으로 비판받았고,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