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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묵 목사는 평소 매우 감동적인 설교로 교인들을 감화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설교집을 남기지 않았습니다.신이건은 최성묵의 설교가 청년들에게 도전과 감동을 주며 저항과 희망의 꿈을 심어주었다고 회상했습니다.그는 중부교회로 적을 옮긴 이유가 바로 최성묵의 설교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선생님의 설교는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과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격분, 그리고 때로는 너무나 사람 냄새가 나는 인간적인 말씀이셨습니다.” 최성묵은 생전에 “설교집 하나 만듭시다”라는 제안에 대해 “야! 그런 것 필요 없어.”라고 답했습니다. 교인들 중 일부는 그의 설교 내용을 개별적으로 녹음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그 기록을 찾기 어려운 상황입니다.최성묵이 자신의 설교집을 만들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지만, 그의..
1987년 6월항쟁이 6.29선언으로 마무리되자, 전국의 노동현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에서는 부산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와 부산민주시민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이어졌습니다. 7월 초부터 다양한 노동자들이 국본 사무실로 몰려와 노조 설립과 투쟁 방향에 대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노동운동가들은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며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조합 결성을 도왔고, 이 움직임은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이런 중요한 시기에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 대사가 부산을 방문하여 중부교회를 찾았습니다. 최성묵은 릴리 대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부산 시민 중에는 민주화를 거부하는 세력을 돕는 미국의 태도에 격분해 미국인을 보면 테러를 불사할 각오로 품에..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박 군은 부산 출신으로, 부마항쟁의 주역이었으나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항쟁을 지켜보며 아픔을 겪었던 부산 시민들에게 이 사건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6월항쟁의 과정에서 부산 시민들은 당당하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2.7 추모대회에서 시민들은 10월 부마항쟁의 거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꼈고, 3.3, 6.10을 거치면서 ‘국민의 힘으로 이 정권을 끝장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이후 매일매일의 치열한 항쟁 과정은 특히 6월 10일부터 19일까지의 10일 동안 밤낮없이 시내 중심가를 누비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 열정으로 나타났습니다. 가톨릭센터 농성의 치열함과 6월 18일 저녁 서면에서 조방 앞까지 가득 메운 30만 시민들이 외쳤던 ‘..
최성묵 목사는 민주화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사업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특히 장애인을 위한 사업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며, 1985년 2월 부산에 한울장애인자활센터를 열었습니다. 이 센터는 당시 장애인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던 부산에서 획기적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한울장애인자활센터에서는 매년 교육생을 모집하여 무료로 1년간 직업교육을 실시했습니다. 특히 컴퓨터 교육이 주목받았는데, 이는 당시 일반 대중에게 보급되지 않은 첨단 기술이었습니다. 최성묵은 이 교육을 통해 장애 청년들이 공기업, 도서관, 회사 등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제1기 교육 때는 구형 XT형 컴퓨터 한 대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컴퓨터와 교육생 수가 늘어나고, 1988년에는 올림픽 때..
1983년, 부림사건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이후 침체되었던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의 활성화로 상징되었으며, 최성묵 목사는 그 선두에 서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부산의 종교계에서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부산지부(1982년 3월 창립), KNCC 부산인권선교협의회(1984년 4월 창립), 부산지구기독청년협의회,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청년불교도연합(1984년 7월 창립) 등 여러 조직이 창립되거나 활성화되었습니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의 기수 역할을 하며,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특히 1984년 4월 22일에 출범한 부산인권선교협의회(부산인권위원회)는 KNCC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의 ..
1982년, 부림사건과 부산미문화원 사건으로 민주화 운동이 큰 타격을 입었고, 중부교회 역시 그 여파를 고스란히 겪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최성묵 목사는 교회 내에서 발생한 내분 사태로 인해 심각한 갈등과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내분의 발단은 여러 요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최성묵이 부림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배포한 유인물에 이름을 넣도록 했다가 나중에 발뺌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비록 그 사실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최성묵이 그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를 단순히 비난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많은 운동가들이 수사기관의 압박 속에서 거짓말을 하며 다른 사람을 보호하려 했던 것처럼, 최성묵도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최성묵은 6월 항쟁 때 대열의 선두에서 학생들과 함께 ..
1982년, 부산의 민주화 운동은 부림사건과 부산미문화원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부교회는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9월부터 시작된 중부교회 내분사태는 교회와 신도들, 그리고 외부의 압력이 얽혀 복잡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중부교회 내분의 전조로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당국의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인해 교인들이 교회 출석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정부기관의 인사들이 교인들을 감시하고 성분을 분석하는 상황에서, 큰 사업을 하는 교인들은 교회 출입을 기피했습니다. 신이건 씨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당신은 동생이 군의 요직에 있으면서 문제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니 불이익이 가더라도 후회는 하지 마십시오.”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이영우 씨는 부산..
1980년대 초, 전두환 군부 집단은 광주학살의 피비린내 속에서 권력을 탈취하며 제5공화국을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폭력과 왜곡의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고, 신군부는 집권 초기부터 잠재적 도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용공 조작 사건을 일으키기로 작정했습니다.1981년 9월, 부산에서는 ‘부림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학생, 종교인, 재야세력을 포함한 22명이 검거되어 사회주의 혁명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입니다. 경찰은 이들을 고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려 했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도 엉성하게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대체로 1970년대 중부교회와 양서협동조합과 관련이 깊었으며, 최성묵 목사와 가까운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최성묵은 이들의 가족들과 함께 석..
1980년대 초, 신군부의 쿠데타 이후 한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신군부는 각 지역의 민주 인사들을 집중적으로 체포하며, 집권을 위한 사전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들은 끊임없는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특히 1980년 7월 19일, 보안사령부 부산분실에 연행된 임기윤 목사가 3일 후인 21일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된 뒤 7월 26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임목사의 사망 원인은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그의 부인이 목격한 바에 따르면, 임목사의 뒷머리 왼쪽이 3센티미터 정도 찢어져 있었고, 피가 말라붙어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황은 그의 죽음에 타살 의혹을 불러일으켰습니다.임기윤 목사의 죽음은 신군부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으..
1980년대 초, 유신체제의 붕괴는 많은 이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안겼습니다. 그러나 12·12 쿠데타 이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이 시기에 최성묵은 동교동의 김대중 전 의원과 대구의 백현국 등과 함께 시국을 논의하며 민주화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민주화 세력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특히 5·17 계엄 확대 이후, 김대중과 최성묵은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신군부는 민주화 세력을 대대적으로 검속하며 그들의 저항을 억누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은 광주에서 5·18 민중항쟁이라는 거대한 저항으로 이어졌습니다. 부산에서도 활동가들이 진상 폭로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체포되는 등, 민주화의 열망은 전국으로 확..
부마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이 시기, 최성묵은 극심한 고문을 받으며 민주화를 위해 싸운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고통을 감수하며, 다른 무고한 사람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의 결단은 단순한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사회의 정의와 민주화를 위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최성묵은 고문을 받는 동안도 결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담담하게 맞섰습니다. 그러나 10월 26일,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은 유신체제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로 인해 부마항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합수부의 계획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최성묵과 함께 연행되었던 이들은 10월 27일 훈방..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정치적 긴장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10월 16일 오전 10시, 수천 명의 부산대학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경부터 도심의 광복동, 창선동, 대청동, 중앙동 등지에서 학생들의 시위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확대되었습니다. 저녁 6시가 지나면서는 퇴근하는 회사원과 노동자들, 심지어 고교생들까지 합류하여 민중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시위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 공격에 맞서 싸웠습니다.10월 17일에는 동아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중구, 서구, 동구 지역에서 21개 파출소와 경찰차량, 경남도청, KBS, MBC, 부산일보 등이 파괴되었습니다. 이에 유신정권은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지역에 ..
1977년부터 최성묵은 부산에서 ‘생명의 전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전화 상담을 제공하는 세계적인 사회운동으로, 1979년에 부산에서 창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최성묵이 준비위원장으로 나서려 하자 중앙정보부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는 즉각 물러나고 부산의대의 김동수 박사에게 부탁하여 이 운동이 성공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1979년은 한국 정치가 더욱 긴장 국면으로 접어드는 시기였습니다. 1978년 12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야당 신민당의 총 득표율이 여당을 1.1% 앞서며 유신체제의 민심 이탈을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되면서 유신체제의 철폐와 민주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습니다.이 무렵, 재야 인사들인 함석..
1976년 12월 13일, 최성묵은 중부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77년 4월 3일 정식으로 목사로서의 길을 걷게 된 그는 부산 지역의 재야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의 기독교 세력도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고, 최성묵은 이를 통해 부산과 서울 간의 연결고리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1977년 4월, 부산지역 도시산업선교회가 조직되며 민주화운동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최성묵은 청년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강연회를 개최하여 시민들에게 민주화운동의 사상과 동향을 알렸습니다. 김정한, 황석영, 백기완 등 유명 강사들이 참여하여 강연회를 통해 부산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민주화운동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청년회는 철거 이주민들의 실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