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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행동적인 신학자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세계적 흐름과는 달리 교회 공동화 현상에 빠지며, 초강세 교세 유지와 이를 바탕으로 오만과 편견을 가지는 것을 개탄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바리사이파를 향해 “뱀같이 사악한 무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았습니다.선생님은 성경의 축자영감설이나 무오류설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 말씀과 교회의 목사님의 말씀을 혼돈하는 현상을 비판하셨습니다. 중세 말, 면죄부를 팔아먹는 형상의 종말론으로 나아가는 현실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하셨습니다. 또한, 타종교와 협력하지 못하는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셨고, 종교의 다원주의보다는 이웃 종교와 대화를 강조하는 신앙관을 유지하셨습니다. 서구의 종교적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의 유신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법과 정의가 무너지고 많은 학생과 청년들이 원하지 않는 감옥으로 가는 사건이 잇따랐습니다. 이 시기에 선생님은 시대적인 양심과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적 현실과 사명감에 부딪치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을 향해 바른 말을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으며, 목회자의 길로 가겠다.” 그리고 선생님은 부산YMCA 총무직을 사임하시고 중부교회 전도사로서의 새로운 길을 시작하셨습니다.저는 솔직히 예수님보다 선생님이 더 좋아서, 전 가족이 기독교인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내와 의논하니 쾌히 동의해 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처음 목회자로서 세례를 주시던 날, 저는 조인두 ..
필자는 선생님이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던 날, 두 가지 사건을 잊지 못한다. 첫 번째는 문익환 목사님께서 추도사를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그분은 “제자인 최목사처럼 민주화를 외치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예언처럼, 문익환 목사님도 몇 년 뒤 통일운동에 전념하시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다. 또 하나의 잊지 못할 기억은 영결식장에서의 중부경찰서 소속 황형사님이다. 그는 중부교회 담당 형사로, 10년 이상 부목사 자격으로 주일 대예배 시간마다 맨 뒤편에 앉아 예배를 보조하며 설교 내용을 요약하여 상부에 보고하던 분이었다. 그날, 황형사는 선생님께서 돌아가시던 날 가장 많이 서럽게 눈물을 흘리셨다.평소 선입감이 좋지 않았던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을 보내드리며 “..
필자는 지금까지 부모님을 제외하고,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잊지 못할 두 사람을 기억한다. 한 분은 나의 형수님 이정희이고, 또 한 분은 1971년 겨울 YMCA 지하다방에서 처음 만나, 청년기 이후 지금까지도 나의 인생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계신 고 최성묵 목사이다. 그간 대책 없이 숨가쁜 인생을 살아왔지만, 선생님을 생각하는 마음앞에서는 흥분되는 자신을 감추기가 힘들다. 선생님의 일상적인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젊은 시절 나를 매료시킨 그분이 나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정신적인 탯줄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선생님을 잊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나의 인생에 감동과 흥미, 그리고 충격과 교훈을 주었다”는 이기적인 동기에서만 출발한 것은 아니다. ..
80년대 전두환 정권을 지나 노태우 정권 시절, 동구권의 변화와 소련과의 수교에 따른 북방 정책 추진 과정에서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통일 문제에 대해 많은 식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는 통일 문제에 있어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는 상황을 우려하며, 정책 당국자나 정치인들의 노림수, 통일 반대론자들의 조직적 저항으로 인한 국민적인 분열을 걱정하셨습니다.특히 선생님은 독일의 통일 과정을 지켜보며 부러움과 함께 남북 평화와 통일 한국을 위해 많은 생각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의 남북관계 기본 원칙과 통일관은 당시 매우 진보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남북 대결 관계를 평화적인 통일로 정착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전제를 두고, “지구상 냉전의 마지막 장을 이 땅에서 매듭짓기 위해서는 독일의 ..
80년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가 격변하던 시기에, 선생님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치에 참여하셨습니다. 민추협 이후, 전두환 정권 하에서의 민주화 과정에서 김광일 변호사, 노무현 변호사, 김재규 형에게 공천권을 주셨습니다. 두 분은 출마하였지만, 김재규 형은 선거 자금 문제로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 선생님은 김영삼과 김대중 두 분의 대통령 출마를 위한 후보 단일화 작업에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하지만 두 지도자가 각자의 길을 갈 때, 선생님은 김대중 노선의 맨 앞자리에 서셨습니다. 이후 선생님은 현직 목회자로는 최초로 평민당 부총재를 역임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한 정치적 참여가 아니라, 지역 민주화를 위한 지방자치 정부 운..
신학자 윌리엄 버클레이는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이를 후회와 참회로 구분합니다.후회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서 생긴 감정이고, 참회는 그 잘못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책임을 지고자 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한국 사회, 특히 공직 사회에서 이러한 참회의 자세가 사라지고 후회와 변명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우려스럽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후회는 종종 범죄가 드러났을 때 느끼는 억울함입니다. 예를 들어, 공무원이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감사에 의해 드러났을 때, 그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난 것에 대한 후회만 할 뿐,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습니다. 반면, 참회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자세로, 이는 개인의 도덕적 성장과 사회적 신뢰를 위해 필수적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위장전입과 같은 범죄..
몇 년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친척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버버리 힐스에서 간이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 식당은 주변의 무역관계 사무실과 모델학교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일마다 식당을 닫고 한인 교회에 참석하는 그녀의 모습은 단골손님들에게 불편을 주었습니다. 특히, 스위스에서 온 단골 손님은 “왜 당신 같은 멀쩡한 사람이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친척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고, 그녀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이 질문은 많은 서구인들이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실, 서구 사회에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적 약자나 외로운 노인들입니다. 바쁜 일상을 보내는 젊고 건강한 사람들은 교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으며, 특별..
최성묵 목사는 평소 매우 감동적인 설교로 교인들을 감화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설교집을 남기지 않았습니다.신이건은 최성묵의 설교가 청년들에게 도전과 감동을 주며 저항과 희망의 꿈을 심어주었다고 회상했습니다.그는 중부교회로 적을 옮긴 이유가 바로 최성묵의 설교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선생님의 설교는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과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격분, 그리고 때로는 너무나 사람 냄새가 나는 인간적인 말씀이셨습니다.” 최성묵은 생전에 “설교집 하나 만듭시다”라는 제안에 대해 “야! 그런 것 필요 없어.”라고 답했습니다. 교인들 중 일부는 그의 설교 내용을 개별적으로 녹음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그 기록을 찾기 어려운 상황입니다.최성묵이 자신의 설교집을 만들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지만, 그의..
1987년 6월항쟁이 6.29선언으로 마무리되자, 전국의 노동현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에서는 부산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와 부산민주시민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이어졌습니다. 7월 초부터 다양한 노동자들이 국본 사무실로 몰려와 노조 설립과 투쟁 방향에 대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노동운동가들은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며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조합 결성을 도왔고, 이 움직임은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이런 중요한 시기에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 대사가 부산을 방문하여 중부교회를 찾았습니다. 최성묵은 릴리 대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부산 시민 중에는 민주화를 거부하는 세력을 돕는 미국의 태도에 격분해 미국인을 보면 테러를 불사할 각오로 품에..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박 군은 부산 출신으로, 부마항쟁의 주역이었으나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항쟁을 지켜보며 아픔을 겪었던 부산 시민들에게 이 사건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6월항쟁의 과정에서 부산 시민들은 당당하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2.7 추모대회에서 시민들은 10월 부마항쟁의 거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꼈고, 3.3, 6.10을 거치면서 ‘국민의 힘으로 이 정권을 끝장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이후 매일매일의 치열한 항쟁 과정은 특히 6월 10일부터 19일까지의 10일 동안 밤낮없이 시내 중심가를 누비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 열정으로 나타났습니다. 가톨릭센터 농성의 치열함과 6월 18일 저녁 서면에서 조방 앞까지 가득 메운 30만 시민들이 외쳤던 ‘..
최성묵 목사는 민주화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사업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특히 장애인을 위한 사업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며, 1985년 2월 부산에 한울장애인자활센터를 열었습니다. 이 센터는 당시 장애인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던 부산에서 획기적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한울장애인자활센터에서는 매년 교육생을 모집하여 무료로 1년간 직업교육을 실시했습니다. 특히 컴퓨터 교육이 주목받았는데, 이는 당시 일반 대중에게 보급되지 않은 첨단 기술이었습니다. 최성묵은 이 교육을 통해 장애 청년들이 공기업, 도서관, 회사 등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제1기 교육 때는 구형 XT형 컴퓨터 한 대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컴퓨터와 교육생 수가 늘어나고, 1988년에는 올림픽 때..
1983년, 부림사건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이후 침체되었던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의 활성화로 상징되었으며, 최성묵 목사는 그 선두에 서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부산의 종교계에서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부산지부(1982년 3월 창립), KNCC 부산인권선교협의회(1984년 4월 창립), 부산지구기독청년협의회,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청년불교도연합(1984년 7월 창립) 등 여러 조직이 창립되거나 활성화되었습니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의 기수 역할을 하며,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특히 1984년 4월 22일에 출범한 부산인권선교협의회(부산인권위원회)는 KNCC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의 ..
1982년, 부림사건과 부산미문화원 사건으로 민주화 운동이 큰 타격을 입었고, 중부교회 역시 그 여파를 고스란히 겪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최성묵 목사는 교회 내에서 발생한 내분 사태로 인해 심각한 갈등과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내분의 발단은 여러 요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최성묵이 부림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배포한 유인물에 이름을 넣도록 했다가 나중에 발뺌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비록 그 사실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최성묵이 그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를 단순히 비난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많은 운동가들이 수사기관의 압박 속에서 거짓말을 하며 다른 사람을 보호하려 했던 것처럼, 최성묵도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최성묵은 6월 항쟁 때 대열의 선두에서 학생들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