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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최성묵은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KSCF의 활동을 마치고, 신앙의 말씀에 따라 사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던 중 부산에서 차선각과 이직형이 최성묵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이미 1960년대 초부터 KSCM과 KSCC 활동을 통해 최성묵을 잘 알고 있었다.부산에서 모임에 올라오기 전부터 차선각은 최성묵을 꼭 만나고 싶어 백방으로 탐문하다가 겨우 천호동의 집을 찾았다. 기대와 흥분이 뒤섞인 만남은 금세 사회변혁을 위한 교회와 학생사회운동에 관한 열띤 토론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중국처럼 촌락에서 도시로, 지방에서 서울로 바람을 몰아간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 시간, 최성묵의 아내가 준비한 간단한 통국수 파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이 자리에서 “..
1960년대 기독학생운동의 통합 과정은 쉽지 않았다. KSCM(한국기독학생운동협의회)와 각 단체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독자성을 유지하려는 오랜 미련 때문에 통합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나 1968년 4월, KSCC(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는 교수, 학생, 실무자 대표로 이루어진 통합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에는 YMCA 전국연맹 이사들이 통합전권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통합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1968년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수원 서울대 농대에서 열린 여름대회에서 KSCM과 대학 YMCA는 ‘한국을 새롭게’라는 주제로 마침내 통합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YWCA는 학생들의 원에도 불구하고 연맹의 이사들이 반대하여 통합운동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결국 YWCA를 제외한 두 단체는 ..
1964년, 최성묵은 KSCC(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로 자리를 옮긴 후, 같은 해 9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연신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연신원에는 그가 존경하는 김정준 박사가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김정준 박사는 부산 동래 출신으로,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와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 독일 함부르크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공부한 후, 1949년 한국신학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63년부터 연세대 교목실장 겸 구약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연신원은 당시 한국의 신학교들이 독자적인 대학원을 설립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WCC 신학위원회에서 30만 불의 재정 지원을 받아 설립된 신학대학원이었다. 그러나 각 교단 신학교들은 2년이 지나지 않아 각자의 대학원을 시작할 정도로 한국교회의 교파주의는 뿌리 ..
1960년대 초, KSCM(한국기독학생운동)은 전국 50여 개 대학과 200여 개 고등학교 기독학생회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었다. 이 시기에 KSCM의 총무를 맡았던 손명걸 목사와 최성묵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며 기독학생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의견 충돌이 종종 있었고, 최성묵은 때때로 화가 나면 책상을 돌려놓고 얼굴도 마주 보지 않을 만큼 고집이 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도 자청해서 맡았다.최성묵을 처음 만난 이직형은 그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매서운 눈길을 가졌고, 질문을 하면 단답형으로 끝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땀에 젖은 노동모자를 항상 쓰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1960년대 초, 한국기독학생운동(KSCM)은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 대학YMCA, 대학YWCA라는 세 개의 주요 단체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단체는 대외적으로 세계기독학생운동연맹(WSCF)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WSCF는 한 나라에 하나의 회원단체만을 인정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학생들이 갈라지지 않고 통합하여 하나가 되자는 요구가 커졌다.1955년, 학생기독교운동체들의 통합을 위한 명동협의회가 열렸고, 여기에는 WSCF 아시아지역 간사 쵸·탄(Kyaw Than)과 3단체의 지도자 및 학생대표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각 단체의 역사적 특성과 사회적 역할의 차이를 넘어 일치를 지향할 것을 합의했다. 중요한 합의 사항 중 하나는 학생기독운동협의회(KSCC)를 설립하자는 것이었..
1960년, 새해가 밝았다. 봄이 오고, 3·15 선거를 전후로 민중의 분노가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결국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는 거대한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 최성묵은 제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시대의 소용돌이는 그를 새로운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는 계기가 되었다.최성묵의 1960년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지만, 12월 14일 장남 혜승이 태어난 기록을 제외하고는 그 해의 사건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확실하다. 제천에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하던 그가 서울로 향하게 된 것은 4·19 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4·19 혁명은 한국교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부조리와 부정부패에 눈을 뜨게 되었다.박형규 목사는 4·19 혁명에 대한 ..
최성묵은 김재준 박사의 권유로 한신대학교 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1955년 한 해 동안 근무했던 포항고등학교를 사직하고, 1956년 4월 5일 한국신학대학 2학년에 편입학했다.새로운 길을 향해 흥해를 떠난 그는 서울로 올라갔다.서울에 도착한 최성묵은 1949년부터 흥해제일교회에서 일했던 강혜순 전도사의 큰집에서 그의 조카의 가정교사를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강 전도사의 남편인 김광열 장로가 소개해 준 것이었다. 당시 강 전도사는 결혼하여 제천에 살고 있었고, 최성묵은 그 집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수 있었다.그 시기에 김순이도 남편과 함께 상경한 후, 강 전도사의 권유로 몇 개월간 제천에서 생활했지만 첫 아이의 임신으로 친정으로 돌아와 해산하게 되었다. 그녀는 장녀 혜림을 출산하고, 얼마 후 그녀는 장..
1955년 3월 25일, 최성묵은 흥해중학교를 사직하게 되었다.당시 흥해중학교 교장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최성묵은 참지 못하고, 직원회의에서 교장을 성토한 후 즉시 사표를 던졌다. 그의 행동은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지 않으려는 강한 성격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최성묵은 교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행동했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사직 후 며칠이 지나고, 포항고등학교의 학생 몇 명이 최성묵을 찾아왔다. 그들은 그에게 포항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포항에서 서울대학교 수학과 출신의 강사를 찾기란 쉽지 않았기에, 학생들의 선택은 현명했다. 최성묵은 학생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1955년 4월 6일 포항고등학교의 수학 강사로 임명되어 수업을 시작했다.그러나 최성묵은 단순히 수..
1953년, 최성묵은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1학기를 마친 후 2학기에는 휴학계를 냈다.그 해 가을, 서울대학교는 서울로 이전했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그는 더 이상 서울대학교를 졸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대학생활의 경험을 충분히 맛본 그는 점점 신학 쪽으로 기울어갔다.6·25 전쟁의 체험 속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했고, 교회 활동을 통해 목회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그러나 최성묵에게는 결혼이라는 당면한 문제가 있었다. 최성묵과 김순이는 모두 이십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고, 김순이는 집안에서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스무 살이 넘으면 결혼을 서두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양가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했다.최성묵의..
6·25 전쟁의 휴전을 앞둔 1952년, 최성묵의 주변에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 그의 부친 최석현 장로의 소천이었고, 둘째, 대한예수교장로회 내에서 교리 문제를 둘러싼 분열이 발생하여 흥해교회가 두 개로 분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최석현 장로의 별세는 최성묵과 그의 가족, 그리고 교회 신도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별세 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흥해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1952년으로 추측된다. 호적부에는 1957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1952년 경에 소천하신 것으로 보인다. 최 장로는 아직 미혼의 자녀들을 부인에게 맡기고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죽음은 최성묵에게 깊은 슬픔과 함께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평소의 가르침을 더욱 명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최성묵은 ..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최성묵은 겨울 동안 가족들의 각별한 간호 아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애썼다.그의 상태는 최악이었고, 몸은 뼈와 가죽만 남은 듯 말라 있었으며, 허리는 총상의 영향으로 휘어져 있었다.그런 상태로 최성묵은 김순이를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김순이의 오빠를 만나러 간다고 둘러대며 그녀를 찾았다.그러나 김순이는 그의 몰골을 보고 놀라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최성묵은 주일마다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며, 불편한 몸으로도 건강 회복에 힘썼다. 이 시기에 최성묵은 ‘골자(骨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그의 쇠약한 모습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이때 최성묵과 함께 인민군 정치공작대에 체포되었던 정용철 목사가 무사히 돌아와 시무하고 있었다. 흥해교회는 전쟁 중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었지만,..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씀은 최석현 장로의 신앙과 인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그의 믿음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식의 목숨을 위협했던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크리스천이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주류 반공주의 기독교와 달리,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며 무의미한 증오와 살육의 고리를 끊으려는 참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였다. 전쟁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어제의 이웃을 오늘의 원수로 만들어내는 종말론적 상황을 낳았다.최성묵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은 흥해 전역에 퍼졌다. 그 소식과 함께 국군과 미군이 마을로 찾아왔다. 그들은 먼저 최성묵의 집을 찾았고, 불편한 몸을 일으킨 최성묵은 그들을 맞이했다.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군 장교는 최성묵에게 겪은 고초를 위로한 후, 그 모든 것이 ..
최성묵의 생사조차 모르는 부모 형제들은 그의 소식에 한없이 무거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에 대한 소문은 모두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당시 사용되던 야전병원 터널 입구가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그곳에서 살아남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죽은 것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전해지면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 보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차마 최성묵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한 가닥의 기적 같은 소식을 기다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았다. 그러나 기다리던 소식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마침내 11월 15일, 부모님은 최성묵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동네에서 삽을 빌어다 놓았다. 다음 날 날이 밝는 대로 곡강터널 입구로 ..
1950년 8월 25일, 최성묵은 인민군 야전병원에 남아 있었고, 그의 누나와 형제들은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면서 점점 불안해졌다. 이때 들려오는 소문은 인민군 야전병원에 있던 환자들을 밤에 트럭에 실어 포항 보경사로 옮기고, 상태가 나은 사람들은 다시 영덕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최성묵의 누나와 이웃 할머니는 가족을 찾기 위해 보경사로 가기로 의논했다.그때, 김순이가 나타났다. 그녀는 피난길에 최성묵이 총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기 위해 최성묵 일가의 피난처로 달려온 것이었다. 최성묵의 누나는 김순이에게 동행을 제의했고, 김순이는 주저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이렇게 세 사람의 여인은 길을 떠났다. 어두워지면 농가의 마당을 빌려 잠을 청하며 힘든 여정을 이어갔다.보경사에 도착하자 인민군이 따발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