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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가 격변하는 시기에 선생님은 정치에도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셨습니다. 민추협 이후 전두환 정권 시절의 민주화 과정에서 김광일 변호사와 노무현 변호사에게 공천권을 주셨고, 두 분은 출마하였지만 김재규 형은 선거 자금 문제로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시간이 지나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 선생님은 김영삼과 김대중 두 분의 대통령 출마를 위한 후보 단일화를 위해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그러나 두 지도자가 각자의 길을 갈 때, 선생님은 김대중 노선의 맨 앞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이후 선생님은 현직 목회자로서는 최초로 짧은 기간이지만 평민당 부총재를 역임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지역 민주화를 위한 지방자치 정부의 운영과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
선생님께서 담임목사로 계셨던 중부교회는 정말로 특이한 교회였습니다. 암울했던 유신 시대와 살벌한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시국을 논의하고 고민을 포용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성묵 목사님은 전국의 청년들과 기독교장로교회 교인뿐만 아니라, 예장, 고신, 감리교 등 여러 교파의 지도자들, 타종교 성직자들, 심지어 무신론자들까지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용기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셨습니다.김영삼, 김대중, 이기택, 박관용 등 당시 야권의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시대 정의에 반하는 판결에 대항하던 김광일, 노무현, 이흥록 변호사, 그리고 함석헌 선생님, 김정준,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홍근수 목사, 한완상 교수, 김동수 교수, 송기현..
1980년대, 선생님의 일상생활은 청년들과 뜻을 함께하는 인사들, 독자적인 행동과 교회 설교를 통해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과 노태우 정권에 맞서 싸우는 연속이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 이후, 선생님의 민주화 투쟁은 그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선생님은 어떠한 회유나 징벌에도 굴하지 않고, 대의와 진실을 위해 마지막 성전을 위해 싸우듯 위협적인 존재로 일관하셨습니다.평소 선생님께서 부르짖던 양심과 인간성을 통한 친화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별로 말씀하지 않았지만, 과거 서울에서 활동할 때 교류했던 민주 인사들, 부산의 김동수 박사와 신부, 광주의 홍남순 변호사, 대구, 포항, 울산 등 전국 각지에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교류가 있었습니다. 특히, 전두환 정권 말기인 ..
1974년 12월, 유신이 한창 진행되던 겨울, 필자는 학생과 청년들로 구성된 51명으로 제주도 행군대회를 주최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의 목적은 당시 유신 정부가 지원하던 사회 운동 단체의 학생 행군 대회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남녀 학생과 청년들은 섬나라 일주 행군을 하며 혼숙(?)을 하고, 13박 14일 동안 젊은 날의 좋은 추억을 만들어 빠른 시간을 보냈습니다.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서귀포에서 저녁 휴식시간에 선술집에서 많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던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술잔을 들며 “유신 반대!”를 외쳤고, 급기야 그 자리에 모인 손님과 집주인 모두가 유신 반대를 위한 집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술집 주인은 많은 부분 술을 공짜로 주는 헤프닝도 벌어졌습니다. 이후 이 모임은 자연스럽게..
민주화 과정에서 "부마항쟁"과 "6월 항쟁"은 우리의 역사를 크게 바꾼 사건들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선생님은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피로에 시달리며 성분도병원에 두 번 입원하셨습니다. 대수술을 받고 생명의 위기를 넘기셨지만, 전두환 정권과 맞서 싸우는 민주화운동에 여전히 헌신하셨습니다.저는 선생님께 건강을 걱정하며 후배들을 독려해 주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선생님은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라는 특유의 웃음으로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후 선생님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여전히 힘든 길을 걸으셨습니다.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거제도 애광원의 행사에 참석하신 후, 저는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때도 선생님은 "나는 건강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필자는 선생님이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던 날, 두 가지 사건을 잊지 못한다. 첫 번째는 문익환 목사님께서 추도사를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제자인 최목사처럼 민주화를 외치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겠다”는 그 말씀은 세월이 흐른 뒤 문익환 목사님도 통일운동에 전념하시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 돌아가신 것을 상기시킨다. 두 번째 잊지 못할 기억은, 영결식장에서 중부경찰서 소속 황형사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다. 황형사는 중부교회 담당 형사로, 10년 이상 교회에서 부목사 자격으로 예배를 보조하시며 설교 내용을 요약해 상부에 보고하던 분이었다. 그날,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날, 그는 가장 많이 서럽게 눈물을 흘리셨다.평소 그를 잘 알지 못했던 나는, 단지 눈인사 정도의 관계였다. 그러나 선생님을 보내드리며 “나는 ..
중부교회 시절, 최성묵 목사님과 저에게는 가장 가슴 아픈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 일부 청년들이 조그만 교회 수익사업으로 인해 목사님께 조직적으로 대항한 "항명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 청년들 중 일부는 유신 시절 감옥에서 고생하던 이들이었지만, 그 외에도 가담한 이들이 많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한때 "인간 최성묵"을 "청년 예수"처럼 따르던 순수한 학생들이었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유신 독재가 한창이던 시기에도 대학교와 일부 교회, 민주 단체 주변에는 이간질을 하던 무리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사건의 발단과 이를 확대하려는 의도를 가진 인물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집사였..
1980년대 후반, 소련 공산당의 「고르바쵸프 서기장」이 취임하면서부터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동유럽의 "자유화 바람"이 불어 닥치는 러시아를 보시면서 때때로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독재, 경제적으로는 계획․통제방식의 경제정책이 골자인 "이론공산주의"에서 새로운 세계문명의 인식과 사회주의의 일대변신을 요구하는 "인간의 창조력"과 "생산성"을 가미하려는 그에게 많은 흥미와 경의를 표시했다.선생께서는 말씀하시길,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비판사회이론에 대한 민중의 관심과 설득력 부족으로 당분간 사회주의 확산은 어렵겠지만, 외국 사회주의국가는 어떤 형태로던지 살아남을 것이며, 우리나라도 특정계층 또는 어떤 형태로 그 역할에 있어 주목받는 시절이 올 것이다"라고 전망하셨다.선생께서는..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의 유신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법과 정의가 무너지고 많은 학생과 청년들이 원치 않는 감옥으로 가는 사건이 증가했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시대의 양심과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적 현실과 사명감에 직면하고 계셨습니다. 부산 YMCA 총무로서의 역할은 그의 사명감에 비해 주변 환경이 버겁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특히 태창목재의 정회장께서 회장으로 계실 때, 예산에 비해 주문 사항이 많아 이사회와 잦은 충돌이 있었고, 회장과 총무 역할에 대한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느 날, 최성묵 목사님은 특유의 웃음으로 “야! 총무가 뭐 ‘가방모찌’나 하는 사람이냐!”라고 말씀하시며 푸념을 담아내셨습니다. 선생님은 간혹 친절한 벗이었던 교육대학의 우창웅 교수님과 바둑을 두며 소중..
1985년, 최성묵 목사님은 장애를 극복하지 못해 취업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한울장애자자활센터」(이하 '한울센터')를 설립하셨습니다. 이 교육센터는 당시로서는 일반 사람들에게 매우 파격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뜻에 따라 많은 장애인들에게 '전산 교육'과 '인간 교육'을 가르쳤으며, 박영미 총무, 최혜림 총무 등 역대 지도자들과 당시 교회 집사였던 이숙희 선생, 에덴주택 김찬한 사장 등 주변 사람들이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한울센터」가 단순히 동정의 대상이 아닌, 전문적인 정보 지식의 함양과 소외된 사람 중심의 인간관계 관리를 바탕으로 한 "21세기 글로벌 지식 공동체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의 선견지명 덕분에 많은 장애인들이 물리적 장애를 극복하고,..
최성묵 목사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1992년 3월 24일로 예정된 국회의원 총선거를 준비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민주화를 위한 강한 의지가 있었고, 그 의지는 그가 평생을 바쳐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거 준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1992년 3월 22일, 그는 거제도에서 열린 기독교 장로회 경남노회에 참석한 후, 노회 참석자들을 숙소에 쉬게 한 뒤 자정 무렵 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부평동 시장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 시각, 사람의 왕래는 끊어져 있었고, 그의 상태를 누가 알아차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근 술집의 주인이 그를 발견하고 즉시 메리놀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중앙동의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구 안상홍증인회)가 초등학교 인근에 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주민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교회가 들어서면 아이들의 학습권과 안전이 침해될 우려가 크다고 주장하며, 280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이에 동의했습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지난 7일부터 중앙동 3003번지에 건축 기계를 반입하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중앙동하나님의교회대책모임은 이 부지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초등학교와 돌봄센터가 위치해 있다고 강조하며, 즉각적인 공사 중단과 건축 허가 취소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형선(44) 중앙동하나님의교회대책모임 대표는 “부지 주변에 다른 학교도 많고, 2000세대 아파트 단지가 새로 들어설 예정”이라며, ..
1987년 대통령선거가 군부정권의 재집권으로 끝난 후, 1988년 4월에 치러진 총선거는 야 3당(평민당, 민주당, 공화당)이 집권 민정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하며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정치적 변화는 보수세력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990년 1월 22일 밀실 협상을 통해 3당(민정당, 민주당, 공화당) 합당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부산 지역에 기반을 둔 민주당과 김영삼 세력이 여당으로 변신하면서 재야 민주세력의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3당 합당 직후, 부산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2월 22일 ‘민자당 장기집권 음모 저지 및 민중 기본권 쟁취 부산시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지역 운동세력을 반민자당투쟁이라는 공동전선으로 묶는 조직적 연대를 확산시켰습니다. ..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미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인민군은 환자를 더 이상 트럭으로 후송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최성묵은 치료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흥해를 향해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힘든 몸을 막대기에 의지해 겨우 일어선 그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운 여정에 나섰다.최성묵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먼저 죽은 인민군 시체에서 옷을 벗겨 인민군복을 입었다. 그 후 북쪽으로 도주하는 인민군 부대를 만나면 숨고, 어두워지면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씩 남쪽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남쪽으로 향한 날 밤, 그는 희미한 달빛 아래 산막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던 중, 안에서 "누구냐?"라는 목소리와 함께 총구가 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