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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이 시기, 최성묵은 극심한 고문을 받으며 민주화를 위해 싸운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고통을 감수하며, 다른 무고한 사람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의 결단은 단순한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사회의 정의와 민주화를 위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최성묵은 고문을 받는 동안도 결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담담하게 맞섰습니다. 그러나 10월 26일,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은 유신체제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로 인해 부마항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합수부의 계획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최성묵과 함께 연행되었던 이들은 10월 27일 훈방..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정치적 긴장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10월 16일 오전 10시, 수천 명의 부산대학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경부터 도심의 광복동, 창선동, 대청동, 중앙동 등지에서 학생들의 시위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확대되었습니다. 저녁 6시가 지나면서는 퇴근하는 회사원과 노동자들, 심지어 고교생들까지 합류하여 민중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시위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 공격에 맞서 싸웠습니다.10월 17일에는 동아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중구, 서구, 동구 지역에서 21개 파출소와 경찰차량, 경남도청, KBS, MBC, 부산일보 등이 파괴되었습니다. 이에 유신정권은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지역에 ..
1977년부터 최성묵은 부산에서 ‘생명의 전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전화 상담을 제공하는 세계적인 사회운동으로, 1979년에 부산에서 창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최성묵이 준비위원장으로 나서려 하자 중앙정보부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는 즉각 물러나고 부산의대의 김동수 박사에게 부탁하여 이 운동이 성공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1979년은 한국 정치가 더욱 긴장 국면으로 접어드는 시기였습니다. 1978년 12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야당 신민당의 총 득표율이 여당을 1.1% 앞서며 유신체제의 민심 이탈을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되면서 유신체제의 철폐와 민주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습니다.이 무렵, 재야 인사들인 함석..
1976년 12월 13일, 최성묵은 중부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77년 4월 3일 정식으로 목사로서의 길을 걷게 된 그는 부산 지역의 재야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의 기독교 세력도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고, 최성묵은 이를 통해 부산과 서울 간의 연결고리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1977년 4월, 부산지역 도시산업선교회가 조직되며 민주화운동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최성묵은 청년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강연회를 개최하여 시민들에게 민주화운동의 사상과 동향을 알렸습니다. 김정한, 황석영, 백기완 등 유명 강사들이 참여하여 강연회를 통해 부산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민주화운동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청년회는 철거 이주민들의 실상을..
1976년 2월 10일, 중부교회 대학생부가 발간한 회지 ‘책방골목’이 경찰의 표적이 되며 사건의 전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회지의 인사말에서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고, 이로 인해 부산대학생 조태원, 동아대학생 이태성, 부산대학생 김영일이 구속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YMCA의 핵심 인물들이었습니다.경찰은 이들을 연행한 후, 박상도의 집을 압수수색하고 일기장 등을 압수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로 연행된 박상도는 심문을 받으며 “순진한 학생들을 선동해서 희생시키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위협을 느끼며, 박상도는 각서를 쓰고 그날 밤에야 풀려났습니다.다음 날, 박상도는 부산시경에 가서 학생들을 면회하려 했지만 신병 인수는 불가능하..
최성묵은 YMCA 총무직을 사퇴한 후 새로운 일터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 즈음, 용두산공원 앞에 있는 한 기계공고에서 최성묵을 교장으로 초빙하는 제안이 들어왔다. 이사장은 고령의 노인으로, 자신을 대신해 학교 전반을 관리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고, 최성묵을 추천받아 직접 면담하게 되었다. 면담에서 이사장은 최성묵에게 교장직을 맡아 줄 것을 제의하며 괴정에 있는 사택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순이도 이사장과의 면담 결과를 듣고 마음에 들어했고, 부부는 그 제안을 수락하기로 합의했다.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김순이가 대청동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백발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중부교회 장로라고 소개하며, 최성묵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가 ..
1972년 4월, 최성묵은 부산 YMCA 총무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문화원에서 1년 반 동안 일한 뒤 안정된 직장을 찾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 성향은 부산 YMCA 이사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필요했다. 당시 이사회는 보수와 진보 간의 치열한 정치적 갈등 속에 있었고, 최성묵의 지명이 가까스로 가결되는 과정은 여러 사람의 설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취임 후 최성묵은 YMCA의 여러 사업에 열성적으로 몰두했다. 시민논단 프로그램을 통해 부산 시민들의 주요 관심사를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1972년 4월 YMCA 대학생회(영봉 대학-Y, 초대 회장 임실근)를 조직하여 젊은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당시 유신체제의 압박 속에서 많은 대학생들이 연합서..
1972년 4월, 최성묵은 부산 YMCA 총무로 취임하게 되었다. 미국문화원에서 1년 반 정도 일한 후의 결정이었고, 그의 진보적 성향을 문제삼았던 부산 YMCA 이사회가 최성묵을 선택하기까지에는 그의 지지자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당시 부산 YMCA 이사회는 보수적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과 진보적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 간의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있었고, 최성묵은 이러한 갈등 속에서 총무직을 맡게 되었다.부산 YMCA는 정태성 장로와 성창기업, 성지중고교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과 김길창 목사와 남성학원, 한성여대의 진보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고, 최성묵의 지명은 치열한 표결 끝에 가까스로 가결되었다. 취임 후 최성묵은 다양한 사업에 열정적으로 몰두했다. 시민논단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부산 시민들의 주요..
1970년 9월, 최성묵은 미국문화원의 청년학생담당 간사직을 맡게 되었다. 대청동에 위치한 미국문화원에서 청년학생담당 간사를 공모했고, 최성묵이 그 자리에 채용된 것이다. 그 당시 신원조사를 담당했던 미국 관리가 “최 선생, 당신의 경력을 조사했는데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왜 한 사람도 없습니까?”라고 묻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이러한 말은 최성묵의 인품과 신뢰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미국문화원에서 청년학생담당 간사로 일하게 되면서, 최성묵은 부산에 온 후 처음으로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부산시내 대학생들의 연합서클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최성묵은 이들을 지도하고 지원하는 일에 매진했다. 서울에서 기독학생운동에 헌신했던 경험과 타고난 열정 덕분에 그는 미국문화원의 학생활동을 성공적으로..
최성묵 가족은 부산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결심했다. 김순이는 천호동의 집을 팔아 부채를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부산 양정동에 전셋집을 얻었다. 양정동 언덕배기에는 집장사들이 지은 비슷한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형편이 어려워 방 하나를 세놓기로 했다. 계약금을 주고 세를 들어오기로 했던 사람이 사정이 생겨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하자, 김순이는 당연히 계약금을 돌려받지 않아도 되었지만 남의 돈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돌려주었다.1969년과 1970년 무렵, 최성묵 가족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기가 찾아왔다. YMCA 총무직이 무산되면서 최성묵은 몸 담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깨끗한 옷을 입고 집을 나서 저녁 늦게 돌아오는 일상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김순이..
1969년, 최성묵은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KSCF의 활동을 마치고, 신앙의 말씀에 따라 사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던 중 부산에서 차선각과 이직형이 최성묵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이미 1960년대 초부터 KSCM과 KSCC 활동을 통해 최성묵을 잘 알고 있었다.부산에서 모임에 올라오기 전부터 차선각은 최성묵을 꼭 만나고 싶어 백방으로 탐문하다가 겨우 천호동의 집을 찾았다. 기대와 흥분이 뒤섞인 만남은 금세 사회변혁을 위한 교회와 학생사회운동에 관한 열띤 토론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중국처럼 촌락에서 도시로, 지방에서 서울로 바람을 몰아간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 시간, 최성묵의 아내가 준비한 간단한 통국수 파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이 자리에서 “..
1960년대 기독학생운동의 통합 과정은 쉽지 않았다. KSCM(한국기독학생운동협의회)와 각 단체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독자성을 유지하려는 오랜 미련 때문에 통합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나 1968년 4월, KSCC(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는 교수, 학생, 실무자 대표로 이루어진 통합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에는 YMCA 전국연맹 이사들이 통합전권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통합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1968년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수원 서울대 농대에서 열린 여름대회에서 KSCM과 대학 YMCA는 ‘한국을 새롭게’라는 주제로 마침내 통합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YWCA는 학생들의 원에도 불구하고 연맹의 이사들이 반대하여 통합운동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결국 YWCA를 제외한 두 단체는 ..
1964년, 최성묵은 KSCC(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로 자리를 옮긴 후, 같은 해 9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연신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연신원에는 그가 존경하는 김정준 박사가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김정준 박사는 부산 동래 출신으로,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와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 독일 함부르크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공부한 후, 1949년 한국신학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63년부터 연세대 교목실장 겸 구약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연신원은 당시 한국의 신학교들이 독자적인 대학원을 설립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WCC 신학위원회에서 30만 불의 재정 지원을 받아 설립된 신학대학원이었다. 그러나 각 교단 신학교들은 2년이 지나지 않아 각자의 대학원을 시작할 정도로 한국교회의 교파주의는 뿌리 ..
1960년대 초, KSCM(한국기독학생운동)은 전국 50여 개 대학과 200여 개 고등학교 기독학생회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었다. 이 시기에 KSCM의 총무를 맡았던 손명걸 목사와 최성묵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며 기독학생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의견 충돌이 종종 있었고, 최성묵은 때때로 화가 나면 책상을 돌려놓고 얼굴도 마주 보지 않을 만큼 고집이 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도 자청해서 맡았다.최성묵을 처음 만난 이직형은 그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매서운 눈길을 가졌고, 질문을 하면 단답형으로 끝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땀에 젖은 노동모자를 항상 쓰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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