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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한국기독학생운동(KSCM)은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 대학YMCA, 대학YWCA라는 세 개의 주요 단체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단체는 대외적으로 세계기독학생운동연맹(WSCF)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WSCF는 한 나라에 하나의 회원단체만을 인정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학생들이 갈라지지 않고 통합하여 하나가 되자는 요구가 커졌다.1955년, 학생기독교운동체들의 통합을 위한 명동협의회가 열렸고, 여기에는 WSCF 아시아지역 간사 쵸·탄(Kyaw Than)과 3단체의 지도자 및 학생대표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각 단체의 역사적 특성과 사회적 역할의 차이를 넘어 일치를 지향할 것을 합의했다. 중요한 합의 사항 중 하나는 학생기독운동협의회(KSCC)를 설립하자는 것이었..
1960년, 새해가 밝았다. 봄이 오고, 3·15 선거를 전후로 민중의 분노가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결국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는 거대한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 최성묵은 제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시대의 소용돌이는 그를 새로운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는 계기가 되었다.최성묵의 1960년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지만, 12월 14일 장남 혜승이 태어난 기록을 제외하고는 그 해의 사건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확실하다. 제천에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하던 그가 서울로 향하게 된 것은 4·19 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4·19 혁명은 한국교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부조리와 부정부패에 눈을 뜨게 되었다.박형규 목사는 4·19 혁명에 대한 ..
최성묵은 김재준 박사의 권유로 한신대학교 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1955년 한 해 동안 근무했던 포항고등학교를 사직하고, 1956년 4월 5일 한국신학대학 2학년에 편입학했다.새로운 길을 향해 흥해를 떠난 그는 서울로 올라갔다.서울에 도착한 최성묵은 1949년부터 흥해제일교회에서 일했던 강혜순 전도사의 큰집에서 그의 조카의 가정교사를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강 전도사의 남편인 김광열 장로가 소개해 준 것이었다. 당시 강 전도사는 결혼하여 제천에 살고 있었고, 최성묵은 그 집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수 있었다.그 시기에 김순이도 남편과 함께 상경한 후, 강 전도사의 권유로 몇 개월간 제천에서 생활했지만 첫 아이의 임신으로 친정으로 돌아와 해산하게 되었다. 그녀는 장녀 혜림을 출산하고, 얼마 후 그녀는 장..
1955년 3월 25일, 최성묵은 흥해중학교를 사직하게 되었다.당시 흥해중학교 교장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최성묵은 참지 못하고, 직원회의에서 교장을 성토한 후 즉시 사표를 던졌다. 그의 행동은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지 않으려는 강한 성격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최성묵은 교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행동했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사직 후 며칠이 지나고, 포항고등학교의 학생 몇 명이 최성묵을 찾아왔다. 그들은 그에게 포항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포항에서 서울대학교 수학과 출신의 강사를 찾기란 쉽지 않았기에, 학생들의 선택은 현명했다. 최성묵은 학생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1955년 4월 6일 포항고등학교의 수학 강사로 임명되어 수업을 시작했다.그러나 최성묵은 단순히 수..
1953년, 최성묵은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1학기를 마친 후 2학기에는 휴학계를 냈다.그 해 가을, 서울대학교는 서울로 이전했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그는 더 이상 서울대학교를 졸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대학생활의 경험을 충분히 맛본 그는 점점 신학 쪽으로 기울어갔다.6·25 전쟁의 체험 속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했고, 교회 활동을 통해 목회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그러나 최성묵에게는 결혼이라는 당면한 문제가 있었다. 최성묵과 김순이는 모두 이십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고, 김순이는 집안에서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스무 살이 넘으면 결혼을 서두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양가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했다.최성묵의..
6·25 전쟁의 휴전을 앞둔 1952년, 최성묵의 주변에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 그의 부친 최석현 장로의 소천이었고, 둘째, 대한예수교장로회 내에서 교리 문제를 둘러싼 분열이 발생하여 흥해교회가 두 개로 분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최석현 장로의 별세는 최성묵과 그의 가족, 그리고 교회 신도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별세 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흥해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1952년으로 추측된다. 호적부에는 1957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1952년 경에 소천하신 것으로 보인다. 최 장로는 아직 미혼의 자녀들을 부인에게 맡기고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죽음은 최성묵에게 깊은 슬픔과 함께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평소의 가르침을 더욱 명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최성묵은 ..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최성묵은 겨울 동안 가족들의 각별한 간호 아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애썼다.그의 상태는 최악이었고, 몸은 뼈와 가죽만 남은 듯 말라 있었으며, 허리는 총상의 영향으로 휘어져 있었다.그런 상태로 최성묵은 김순이를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김순이의 오빠를 만나러 간다고 둘러대며 그녀를 찾았다.그러나 김순이는 그의 몰골을 보고 놀라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최성묵은 주일마다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며, 불편한 몸으로도 건강 회복에 힘썼다. 이 시기에 최성묵은 ‘골자(骨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그의 쇠약한 모습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이때 최성묵과 함께 인민군 정치공작대에 체포되었던 정용철 목사가 무사히 돌아와 시무하고 있었다. 흥해교회는 전쟁 중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었지만,..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씀은 최석현 장로의 신앙과 인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그의 믿음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식의 목숨을 위협했던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크리스천이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주류 반공주의 기독교와 달리,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며 무의미한 증오와 살육의 고리를 끊으려는 참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였다. 전쟁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어제의 이웃을 오늘의 원수로 만들어내는 종말론적 상황을 낳았다.최성묵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은 흥해 전역에 퍼졌다. 그 소식과 함께 국군과 미군이 마을로 찾아왔다. 그들은 먼저 최성묵의 집을 찾았고, 불편한 몸을 일으킨 최성묵은 그들을 맞이했다.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군 장교는 최성묵에게 겪은 고초를 위로한 후, 그 모든 것이 ..
최성묵의 생사조차 모르는 부모 형제들은 그의 소식에 한없이 무거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에 대한 소문은 모두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당시 사용되던 야전병원 터널 입구가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그곳에서 살아남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죽은 것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전해지면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 보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차마 최성묵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한 가닥의 기적 같은 소식을 기다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았다. 그러나 기다리던 소식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마침내 11월 15일, 부모님은 최성묵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동네에서 삽을 빌어다 놓았다. 다음 날 날이 밝는 대로 곡강터널 입구로 ..
1950년 8월 25일, 최성묵은 인민군 야전병원에 남아 있었고, 그의 누나와 형제들은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면서 점점 불안해졌다. 이때 들려오는 소문은 인민군 야전병원에 있던 환자들을 밤에 트럭에 실어 포항 보경사로 옮기고, 상태가 나은 사람들은 다시 영덕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최성묵의 누나와 이웃 할머니는 가족을 찾기 위해 보경사로 가기로 의논했다.그때, 김순이가 나타났다. 그녀는 피난길에 최성묵이 총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기 위해 최성묵 일가의 피난처로 달려온 것이었다. 최성묵의 누나는 김순이에게 동행을 제의했고, 김순이는 주저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이렇게 세 사람의 여인은 길을 떠났다. 어두워지면 농가의 마당을 빌려 잠을 청하며 힘든 여정을 이어갔다.보경사에 도착하자 인민군이 따발총..
1980년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가 격변하는 시기에 선생님은 정치에도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셨습니다. 민추협 이후 전두환 정권 시절의 민주화 과정에서 김광일 변호사와 노무현 변호사에게 공천권을 주셨고, 두 분은 출마하였지만 김재규 형은 선거 자금 문제로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시간이 지나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 선생님은 김영삼과 김대중 두 분의 대통령 출마를 위한 후보 단일화를 위해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그러나 두 지도자가 각자의 길을 갈 때, 선생님은 김대중 노선의 맨 앞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이후 선생님은 현직 목회자로서는 최초로 짧은 기간이지만 평민당 부총재를 역임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지역 민주화를 위한 지방자치 정부의 운영과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
선생님께서 담임목사로 계셨던 중부교회는 정말로 특이한 교회였습니다. 암울했던 유신 시대와 살벌한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시국을 논의하고 고민을 포용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성묵 목사님은 전국의 청년들과 기독교장로교회 교인뿐만 아니라, 예장, 고신, 감리교 등 여러 교파의 지도자들, 타종교 성직자들, 심지어 무신론자들까지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용기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셨습니다.김영삼, 김대중, 이기택, 박관용 등 당시 야권의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시대 정의에 반하는 판결에 대항하던 김광일, 노무현, 이흥록 변호사, 그리고 함석헌 선생님, 김정준,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홍근수 목사, 한완상 교수, 김동수 교수, 송기현..
1980년대, 선생님의 일상생활은 청년들과 뜻을 함께하는 인사들, 독자적인 행동과 교회 설교를 통해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과 노태우 정권에 맞서 싸우는 연속이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 이후, 선생님의 민주화 투쟁은 그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선생님은 어떠한 회유나 징벌에도 굴하지 않고, 대의와 진실을 위해 마지막 성전을 위해 싸우듯 위협적인 존재로 일관하셨습니다.평소 선생님께서 부르짖던 양심과 인간성을 통한 친화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별로 말씀하지 않았지만, 과거 서울에서 활동할 때 교류했던 민주 인사들, 부산의 김동수 박사와 신부, 광주의 홍남순 변호사, 대구, 포항, 울산 등 전국 각지에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교류가 있었습니다. 특히, 전두환 정권 말기인 ..
1974년 12월, 유신이 한창 진행되던 겨울, 필자는 학생과 청년들로 구성된 51명으로 제주도 행군대회를 주최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의 목적은 당시 유신 정부가 지원하던 사회 운동 단체의 학생 행군 대회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남녀 학생과 청년들은 섬나라 일주 행군을 하며 혼숙(?)을 하고, 13박 14일 동안 젊은 날의 좋은 추억을 만들어 빠른 시간을 보냈습니다.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서귀포에서 저녁 휴식시간에 선술집에서 많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던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술잔을 들며 “유신 반대!”를 외쳤고, 급기야 그 자리에 모인 손님과 집주인 모두가 유신 반대를 위한 집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술집 주인은 많은 부분 술을 공짜로 주는 헤프닝도 벌어졌습니다. 이후 이 모임은 자연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