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민주화 과정에서 "부마항쟁"과 "6월 항쟁"은 우리의 역사를 크게 바꾼 사건들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선생님은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피로에 시달리며 성분도병원에 두 번 입원하셨습니다. 대수술을 받고 생명의 위기를 넘기셨지만, 전두환 정권과 맞서 싸우는 민주화운동에 여전히 헌신하셨습니다.저는 선생님께 건강을 걱정하며 후배들을 독려해 주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선생님은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라는 특유의 웃음으로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후 선생님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여전히 힘든 길을 걸으셨습니다.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거제도 애광원의 행사에 참석하신 후, 저는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때도 선생님은 "나는 건강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필자는 선생님이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던 날, 두 가지 사건을 잊지 못한다. 첫 번째는 문익환 목사님께서 추도사를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제자인 최목사처럼 민주화를 외치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겠다”는 그 말씀은 세월이 흐른 뒤 문익환 목사님도 통일운동에 전념하시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 돌아가신 것을 상기시킨다. 두 번째 잊지 못할 기억은, 영결식장에서 중부경찰서 소속 황형사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다. 황형사는 중부교회 담당 형사로, 10년 이상 교회에서 부목사 자격으로 예배를 보조하시며 설교 내용을 요약해 상부에 보고하던 분이었다. 그날,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날, 그는 가장 많이 서럽게 눈물을 흘리셨다.평소 그를 잘 알지 못했던 나는, 단지 눈인사 정도의 관계였다. 그러나 선생님을 보내드리며 “나는 ..
중부교회 시절, 최성묵 목사님과 저에게는 가장 가슴 아픈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 일부 청년들이 조그만 교회 수익사업으로 인해 목사님께 조직적으로 대항한 "항명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 청년들 중 일부는 유신 시절 감옥에서 고생하던 이들이었지만, 그 외에도 가담한 이들이 많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한때 "인간 최성묵"을 "청년 예수"처럼 따르던 순수한 학생들이었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유신 독재가 한창이던 시기에도 대학교와 일부 교회, 민주 단체 주변에는 이간질을 하던 무리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사건의 발단과 이를 확대하려는 의도를 가진 인물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집사였..
1980년대 후반, 소련 공산당의 「고르바쵸프 서기장」이 취임하면서부터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동유럽의 "자유화 바람"이 불어 닥치는 러시아를 보시면서 때때로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독재, 경제적으로는 계획․통제방식의 경제정책이 골자인 "이론공산주의"에서 새로운 세계문명의 인식과 사회주의의 일대변신을 요구하는 "인간의 창조력"과 "생산성"을 가미하려는 그에게 많은 흥미와 경의를 표시했다.선생께서는 말씀하시길,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비판사회이론에 대한 민중의 관심과 설득력 부족으로 당분간 사회주의 확산은 어렵겠지만, 외국 사회주의국가는 어떤 형태로던지 살아남을 것이며, 우리나라도 특정계층 또는 어떤 형태로 그 역할에 있어 주목받는 시절이 올 것이다"라고 전망하셨다.선생께서는..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의 유신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법과 정의가 무너지고 많은 학생과 청년들이 원치 않는 감옥으로 가는 사건이 증가했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시대의 양심과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적 현실과 사명감에 직면하고 계셨습니다. 부산 YMCA 총무로서의 역할은 그의 사명감에 비해 주변 환경이 버겁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특히 태창목재의 정회장께서 회장으로 계실 때, 예산에 비해 주문 사항이 많아 이사회와 잦은 충돌이 있었고, 회장과 총무 역할에 대한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느 날, 최성묵 목사님은 특유의 웃음으로 “야! 총무가 뭐 ‘가방모찌’나 하는 사람이냐!”라고 말씀하시며 푸념을 담아내셨습니다. 선생님은 간혹 친절한 벗이었던 교육대학의 우창웅 교수님과 바둑을 두며 소중..
1985년, 최성묵 목사님은 장애를 극복하지 못해 취업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한울장애자자활센터」(이하 '한울센터')를 설립하셨습니다. 이 교육센터는 당시로서는 일반 사람들에게 매우 파격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뜻에 따라 많은 장애인들에게 '전산 교육'과 '인간 교육'을 가르쳤으며, 박영미 총무, 최혜림 총무 등 역대 지도자들과 당시 교회 집사였던 이숙희 선생, 에덴주택 김찬한 사장 등 주변 사람들이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한울센터」가 단순히 동정의 대상이 아닌, 전문적인 정보 지식의 함양과 소외된 사람 중심의 인간관계 관리를 바탕으로 한 "21세기 글로벌 지식 공동체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의 선견지명 덕분에 많은 장애인들이 물리적 장애를 극복하고,..
최성묵 목사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1992년 3월 24일로 예정된 국회의원 총선거를 준비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민주화를 위한 강한 의지가 있었고, 그 의지는 그가 평생을 바쳐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거 준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1992년 3월 22일, 그는 거제도에서 열린 기독교 장로회 경남노회에 참석한 후, 노회 참석자들을 숙소에 쉬게 한 뒤 자정 무렵 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부평동 시장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 시각, 사람의 왕래는 끊어져 있었고, 그의 상태를 누가 알아차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근 술집의 주인이 그를 발견하고 즉시 메리놀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중앙동의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구 안상홍증인회)가 초등학교 인근에 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주민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교회가 들어서면 아이들의 학습권과 안전이 침해될 우려가 크다고 주장하며, 280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이에 동의했습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지난 7일부터 중앙동 3003번지에 건축 기계를 반입하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중앙동하나님의교회대책모임은 이 부지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초등학교와 돌봄센터가 위치해 있다고 강조하며, 즉각적인 공사 중단과 건축 허가 취소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형선(44) 중앙동하나님의교회대책모임 대표는 “부지 주변에 다른 학교도 많고, 2000세대 아파트 단지가 새로 들어설 예정”이라며, ..
1987년 대통령선거가 군부정권의 재집권으로 끝난 후, 1988년 4월에 치러진 총선거는 야 3당(평민당, 민주당, 공화당)이 집권 민정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하며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정치적 변화는 보수세력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990년 1월 22일 밀실 협상을 통해 3당(민정당, 민주당, 공화당) 합당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부산 지역에 기반을 둔 민주당과 김영삼 세력이 여당으로 변신하면서 재야 민주세력의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3당 합당 직후, 부산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2월 22일 ‘민자당 장기집권 음모 저지 및 민중 기본권 쟁취 부산시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지역 운동세력을 반민자당투쟁이라는 공동전선으로 묶는 조직적 연대를 확산시켰습니다. ..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미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인민군은 환자를 더 이상 트럭으로 후송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최성묵은 치료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흥해를 향해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힘든 몸을 막대기에 의지해 겨우 일어선 그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운 여정에 나섰다.최성묵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먼저 죽은 인민군 시체에서 옷을 벗겨 인민군복을 입었다. 그 후 북쪽으로 도주하는 인민군 부대를 만나면 숨고, 어두워지면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씩 남쪽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남쪽으로 향한 날 밤, 그는 희미한 달빛 아래 산막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던 중, 안에서 "누구냐?"라는 목소리와 함께 총구가 튀어..
1950년 8월 23일, 한국 전쟁의 포화 속에서 최성묵은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포항 주변의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제트기와 함재기의 폭격, 함포 사격이 이어졌다. 그는 인민군 부상병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치안대가 피난민 천막을 뒤져 남자들을 의용군으로 징발하는 상황에 처했다. 최성묵은 조막손이 권유한 대로 호박을 상처에 발랐으나 통증은 여전했고, 몸은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상처를 방치하면 죽음이 임박할 것이라는 판단에 최성묵은 가족들에게 중대한 제안을 했다. 그는 인민군 야전병원에 입원하겠다고 결심했다. 가족들은 그의 제안에 통곡하며 절망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치료를 받겠다고 요청했다. 8월 25일, 형제와 친구, 이웃의 도움으로 최성묵은 담가에 실려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좁은 ..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최성묵은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1950년 8월 21일, 정용철 목사의 제안으로 최성묵과 그의 동료들은 바닷가로 피난을 갔지만, 그곳에서 인민군 정치공작대와 지방 좌익들에게 적발되어 40여 명의 우익 인사들과 함께 연행되는 신세가 되었다.최성묵은 하느님의 가호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상황을 극복하려 했다.그들은 바닷가의 한 마을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은 후, '조막손'이라는 빨치산 대장에게 끌려 험한 계곡으로 향하게 되었다. 최성묵은 그 길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임을 직감하고 절망에 빠졌다. 계곡에서 최형택이라는 의사가 조막손의 총에 맞아 즉사하는 끔찍한 순간이 다가오고, 이응호라는 교원은 운 좋게 방면되었다. 최성묵은 김종수와 함께 남게 되었고, 조막손은 그들에게 "인민의 적"이..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최성묵의 삶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그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흥해학도의용대의 부대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최성묵은 직접 겪은 전쟁의 생생한 경험을 육필원고로 남겼으며, 그 기록은 2002년에 간행된 추모집 『그의 부활을 기다리며』에 수록되어 있다.전쟁 초기, 인민군은 빠른 속도로 남한을 침략하며 많은 지역을 점령했다. 이때 최성묵은 흥해학도의용대를 조직하여 학생들과 함께 정보를 수집하고, 적의 침입을 알리는 임무를 맡았다. 1950년 8월 10일, 학도의용대는 150명의 대원을 배치하여 인민군의 침입을 경계했다. 그날 밤, 포화 소리와 함께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8월 11일 아침, 인민군이 흥해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최성..
1945년 8월, 조선은 마침내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 해는 최성묵의 삶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그는 의창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1월 5일 포항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당시 포항중학교는 일제시대 5년제로 운영되었으나 해방 이후 6년제로 바뀌었다.흥해에서 포항까지는 약 20리로, 최성묵은 친구들과 함께 걸어서 통학했다.이 시기 최성묵의 활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48년 1월 7일, 흥해교회의 박순석 목사는 미래세대의 신앙교육을 위해 소년회를 창립하였고, 최성묵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포항중학교 3학년 때였고, 이 시기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젊은 정용철 목사가 시무하면서 교회는 여러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게 된다. 정 목사는 학생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한신대의 ..
내 블로그 - 관리자 홈 전환 |
Q
Q
|
---|---|
새 글 쓰기 |
W
W
|
글 수정 (권한 있는 경우) |
E
E
|
---|---|
댓글 영역으로 이동 |
C
C
|
이 페이지의 URL 복사 |
S
S
|
---|---|
맨 위로 이동 |
T
T
|
티스토리 홈 이동 |
H
H
|
단축키 안내 |
Shift + /
⇧ + /
|
* 단축키는 한글/영문 대소문자로 이용 가능하며, 티스토리 기본 도메인에서만 동작합니다.